|
전체글 수: 98 |
|
||||||||||
|---|---|---|---|---|---|---|---|---|---|---|
부역에 동원돼 만두 여덟 개를 먹었다.
월간조선 하버드에 온 李光耀의 특별 강연
----------------------------------------------------------
.....................................................
모택동이 말하기를 경지면적을 1/3로 줄이고, 1/3은 공원으로 만들고, 1/3은 목장으로 만들어도 쌀이 남아돈다고 했습니다. 그 비결은 깊이 갈고 빽빽하게 심는, 심경물식이라고 했습니다. 농업담당 중앙당 비서에게 금년에 얼마나 생산했냐고 물어봤더니 5억톤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해에 우리 중앙당으로 중국 고위인사가 찾아왔기에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말도 마십시오. 아사자가 너무 많아 내다 파묻을 수가 없어서 집 앞에 그냥 묻고 있습니다. 어떤 큰 부락들은 인구가 1/5로 줄었습니다. 쌀을 1억8천7백만톤 밖에 생산 못했습니다.”
.......................................................
1975.12.28. 저우언라이 일기. ............................................................ "국가가 매우 불행하다. 건국 26년인데 6억 인구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 공산당만 노래하고 지도자 찬양만 하는데 이것은 공산당 실패의 한 장면이다."
.......................................................... 그러나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만난 중국 유학생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놀랍게도 나는 모택동과 4인방을 지지하는 유학생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 ....................................................... 문혁 10년간 중국은 약 5000억 위안(약 100조 원)의 국내총생산(GDP)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중국 건국 이후 30년간 투자한 기초 인프라 건설비의 80%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다. .......................................................
―언젠가 ‘만두를 배불리 먹고 싶어 작가가 됐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인생에서 처음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열여덟 살 때다. 부역에 동원돼 만두 여덟 개를 먹었다. 뱃가죽이 늘어지도록 먹는 게 소원인 건 당연했다.” ....................................................
[... 우리끼리 속이고 우리에게 준 땅을 각자 사유하자...]
..................................................... 여러분들은 인구 10억이 넘는 거대한 중국이 오늘과 같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 전체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중국 안희성이라고 하는 작은 성에 한 50여 가구도 안 되는 집에서 처음으로 그 몇 사람이 모여 가지고 했더니 인민공사는 자기가 만들어도 자기 게 아니고 제 땅이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했는데 네가 나와서 나누면 네가 가져라 밤 새워가며 비가 오면 우산 받고 하고 이렇게 해서 어마어마한 소출을 내니까 공출 다 하고 남는 것 엄청난 생산성을 가지니까 다른 동네는 다 굶주리는데 이 동네만 떵떵거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 모델을 보고 이게 살길이구나. 불과 몇 십 호 안 되는 그것이 10억 명을 넘는 오늘의 중국의 소위 사회주의를 하면서도 자본주의 경제를 들여올 수 있는 티핑 포인트가 되었다. .....................................................
.....................................................
하나는 이른바 `감시 비용'이 높아 농민들의 적극성을 충분히 동원하기 어렵고 `무임승차' 현상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농업생산의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농민들이 그 정보를 제대로 이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이는 농업에서도 시장경제 제도가 계획경제 제도보다 효율적이라는 원론적인 문제에 귀결된다.
무슨 일에서나 모두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 결정을 하지 못하는 제도하에서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변 사람들과도 전혀 이해 관계가 없는 생산활동에 대해 창의성이나 노력을 발휘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개혁 이전에 정부가 옥수수를 많이 심으라고 하면 농민들은 경작지의 토양 조건이 옥수수 재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조건 따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생산노동 자체에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 하남성의 한 농촌에서는 1958년에 모택동이 시찰한 적이 있는 한 뙈기의 면화 시험밭이 있었다. 비록 농민들은 생산 경험으로부터 같은 땅에 계속 면화를 심으면 생산량이 크게 감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모택동이 시찰했던 면화 시험밭에 다른 곡식을 심으면 문책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개혁 이전까지 20년 이상이나 계속 면화만 심어 왔다. 또 면화 생산량이 너무 낮으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해마다 갈수록 많은 인력과 비료 및 농약을 낭비해 가면서 모택동이 시찰했던 면화 시험밭이라는 `간판'을 계속 지켜야 했다.
이처럼 모택동 사망 후인 1978년까지도 농민들이 집단노동제도를 이탈한다는 것은 실로 비장한 모험이었다. 현재 이 원시적인 내용의 계약서는 중국 농업개혁의 최초의 역사적 문헌으로 간주되어 북경의 중국역사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
맑스·레닌주의에 의하면 공산주의 사회에는 반대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사회는 하나의 사회주의 국가로서 반대계급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
누가 어떤 재화를 좋아하는지, 생산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생산가능성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누가 어떤 생산기술과 재주, 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관한 지식은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의 각처에 흩어져 존재한다. 하이에크는 이를 지식의 분산(division of knowledge)이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이러한 지식의 대부분은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개인들은 이러한 지식을 기초로 하여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첫 번째 문제는 개개인들이 서로 다른 지식을 기초로 하여 세운 계획들을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국외자인 국가 계획당국이 이 계획들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각처에 흩어져 존재하는 지식을 전부 수집하여 가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계획당국자는 누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나치즘의 뿌리는 사회주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고, 또한 나치즘은 집단주의로서의 사회주의가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또 다른 형태로 재현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경제학과 지식}이라는 논문보다 평이한 문체로 {노예로의 길}에서 자유자본주의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현대적인 사회 경제적 분업의 복잡성 때문에 중앙의 계획당국이 계획을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수없이 많아서 이들을 총괄적으로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경제주체들이 자유롭게 결정되는 가격에 대해 각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기초하여 개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자유 시장경제는 중앙 계획당국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방법으로 수많은 새로운 지식들을 발견하고 확산시켜, 이를 전 사회에 유통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1945년 {사회에서의 지식의 활용}(이 논문은 {개인주의와 경제질서}에 수록)이라는 논문에서 더욱 더 심화시킨다. 그는 시장경제를 거대한 의사소통 체계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시장경제의 경쟁을 모든 사회악의 근원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자유경쟁을 복권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세계에서는 경쟁은 필요가 없다.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경우에서만 경쟁은 의미가 있다. 그는 경쟁은 몰랐던 사실을 발견하는 발견적 절차라는 것을 규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경쟁은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잘못된 지식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절차이다.
계획경제는 비효율적 제도가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제도
그러나 하이에크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 계획경제(뿐만 아니라 부분적인 계획도)는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 그것이 개인적 자유를 소멸시키고 전체주의를 야기한다는 이유 이외에도 - 이 점이 특히 중요한 이유인데, 사회주의 계획경제 그 자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제과정을 의식적으로, 즉 목적 지향적으로 통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어떠한 정신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불가능성을 해결하는 것이 자유를 기초로 하는 시장경제의 발견적 절차라는 것이다. .............................................................
----------------------------------------------------------------
.....................................................................
-----------------------------------------------------------------
북한서 사업하는 건 광주리로 물 퍼내기
나의 가슴속에 의문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은 1982년인가 1983년부터였다. 최초에는 조그마한 의심이었다. 그 뒤로 북조선 본국과 在日동포 사이에는 합작사업이 시작되었다. 1984년 9월 合營法(합영법)이 만들어지고, 라면 공장에서부터 중금속 공장에 이르기까지 100개가 넘는 공장이 북조선 각지에 세워졌다. 金日成의 말씀이 있었던 1986년 9월에는 북조선으로부터 合營經濟代表團이 일본에 와서 朝鮮國際合營總會社의 설립 조인식을 가졌다. 자본금은 약 120만 달러로 기억한다. 朝·日이 각각 50%씩 출자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는 거의 전액을 일본 측이 내놓았다.
제목 : 귤이 아니라 사과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데
귤을 사계절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김정일과 김용순정도 일것입니다. 아마 김용순도 자기가 먹고싶을때 귤을 먹을 수 있을런지는 잘모르지만... 남한에 와서 사계절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란적이 있었어요.. 여기서 노가다 하는게 북한에서 장관하는 것 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
[...북에서는 약에 쓰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그 탐스러운 참외들이 이국의 정서를 풍기고 있었다.....]
.............................................................
우리 모녀가 ‘가다가 죽으면 죽는 게지!’ 하는 비장한 결심을 품고 산을 내려와 두만강물에 들어선 것은 1997년 8월15일 새벽 2시경이었다. 두만강 감탕물을 꼴깍꼴깍 먹으며 익사의 경계선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중국땅에 올랐다. 누가 볼세라 강기슭의 무성한 강냉이밭에 들어간 우리 모녀는 잠깐새에 국경을 넘었다는 것이 꿈만 같아서 ‘이게 중국땅이 옳긴 옳은가?’하고 의심이 다 생겼다.
......................................................
..................................................... 남한에는 동네슈퍼에 가도 설탕이 있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북한에서는 어린이들이 감기에 걸리면 어머니가 ‘귀한 약’으로 한 숟가락씩 뜨거운 물에 정성껏 타먹이는 것이 설탕이다.
............................................................ 평양에서 묘향산까지 나무가 하나도 없는 거야. 식량 자급자족하겠다며 산을 깎아 다 밭으로 만들었는데 그래 봐야 식량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고 허구헌날 홍수만 나는 거야. 오히려 식량난을 악화시키고 있는 거지.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북한에 나무 심기 운동이라니까.(웃음)
.....................................................
실향민 1세(직접 월남 당사자) 1030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귀하가 월남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ㆍ북한에서 반공투쟁을 하다가 피신 또는 탈출하여 … 16.1% ㆍ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자본가, 지주 종교인 등)로 찍혀서 …15.1% ㆍ어린 나이였으므로 그저 어른들 손에 이끌려서 … 3.2% ㆍ기타 10여 가지 이유의 합계 … 14.8%
----------------------------------------------------------------
............................................................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하고 나서 농민들은 좋아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다가 막상 수확을 할 때가 되자 북한정권은 일제하 공출보다 더 많은 비율로 수확물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면서 농민들의 마음도 돌아섰지요.” .......................................................
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세력은 상당수 북한을 탈출하고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반발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반발세력이 생성된 것이다. 토지개혁 이후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갔기 때문이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인지주제에서 국가지주제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은 도시나 농촌에서 기아가 속출하는 현황이었다고 한다. ...................................................................
..................................................... 그런데 북에서는 소련군의 비호와 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 일파가 1946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한 후 공산주의체제 구축에 토지개혁은 대지주, 중농, 자작농, 소작인들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평온한 마을공동체에 급격한 사회변혁을 가져왔다. 현물세나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변혁은 경제체제 면에서 농민들의 불만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현물세는 이전의 소작제보다도 더 가혹할 정도로 높은 비율이었다. 특히 지주와 부농계층이 겪게 된 재산상의 박탈과 심적 당혹감은 매우 컸다. 당시 북한공산정권은 3할 4부의 현물세를 징수하는 외에, 해방의 ‘은인’인 소련군에게 헌납한다는 명분으로 ‘성충미’와 ‘애국미’의 명목으로 세금을 강제 징수하였다.
북한정권은 자신들이 실시한 초기 사회주의정책에 방해가 되는 지식인, 종교인, 지방유지들로 구성된 자치회나 치안대의 지도자들
.....................................................
-------------------------------------------------------------------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개최
이날 38선철폐요구국민대회에 군중이 들고 나선 기치와 표어는 다음과 같다.
38絞首線 撤廢 38以北의 農民의 食糧을 약탈 말라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自主獨立의 전제조건이다 38以北의 機械없는 공장의 노동자를 살리자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言論機關은 반성하라 38以北의 진상을 정확히 報道하라 民族의 總意로 38線 撤廢를 요구하자
그 다음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으로부터 李承晩, 金九의 축사를 대독한 후 서북선의 실정보고에 들어가 宋義淳, 崔奎恒, 白凡石 3인의 보고연설에 이어 다음과 같은 決議文 낭독이 있은 후 독립만세 삼창으로서 의의깊은 대회의 막을 닫고 동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
1) 朝鮮의 38도선은 外敵이 항복하기 전 聯合軍參謀總長會議에서 작전상의 필요로 획정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금일의 朝鮮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치 아니한다. 이 후도 美蘇兩軍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주둔하여 현재와 같은 3천만 민족의 統一團結과 自主國家 건설에 지장이 클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파멸을 초래하여 國民生活을 도탄에 빠지게 하며 政治·經濟 文化·交通·通信·居住의 자유를 拘?하는 바 큼으로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聯合軍과 聯合軍總司令官 及 美蘇共同委員會에 대하여 38선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여 其 목적의 관철을 기하기를 결의함.
38以北을 바라보건대 진정한 民意를 무시하고 소수인원의 恣意로 된 臨時人民委員會가 있어 입으로 民主主義를 표방하면서 민중을 억압 기만하여 후일 政權의 횡탈을 꾀하려 하니 우리 어찌 만연 방관할 수 있으랴. 이제 우리 3천만 동포는 理論과 표방에 속지 말고 사리와 감정을 떠나서 현실을 엄정 냉정히 관찰하여 정사를 가르고 □□을 판단하여 우리의 추앙 신앙하는 民族의 領導者를 선택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朝鮮의 血統과 民族的 良心을 가진 3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절대 지지하는 것을 천하에 선명하여 써 內로는 民心의 歸一을 策하며 外로는 이를 萬邦으로 하여금 大韓國民의 完全統一政權으로 승인케 하기를 결의함.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 라듸오"로 듯는 이남의 소식
....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1945.9.12. 매일신보 .
...................................................
이와같이 미군은 언론자유에 대하여 취재를 방해하고 검열을 하려하지는 않으나 그것의 정당한 의미의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이런 경우는 별도로 강구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필요까지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조선에 온 뒤로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신문사를 통해서 조선이 어떠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만큼 나는 바라노니 부디 여러분은 이 기회를 조선신문사상의 일대 혁신전환단계로 삼아 주기를 바란다. 미국의 제 신문과 같이 신문의 역할을 다 하는데 있어서는 대중을 지도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
남쪽 차저 온 북조선동포 매일 평균 천5백명을 돌파
5월에 북쪽에서 온 동포 7만6천6백여명
보건후생부 발표에 의하면 지난 5월중 38선을 건너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으로 넘어 온 동포들에게 개성을 비롯한 6개 집결지 검역소에서 시행한 검역성적은 다음과 같다.
소독인원수 38,786 보통병자수 1,968 전염병자수
........................................................
실향민 단체의 부설 연구소에서 지난 90년대에 ‘이북도민의 월남동기 및 월남시기’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통계를 볼 수 있었다. 실향민 1세(직접 월남 당사자) 1030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귀하가 월남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ㆍ북한공산통치를 체험하고 공산당이 싫어서 … 50.8% ㆍ북한에서 반공투쟁을 하다가 피신 또는 탈출하여 … 16.1% ㆍ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자본가, 지주 종교인 등)로 찍혀서 …15.1% ㆍ어린 나이였으므로 그저 어른들 손에 이끌려서 … 3.2% ㆍ기타 10여 가지 이유의 합계 … 14.8%
이 통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산북한 체제에 등을 돌리거나 반동으로 쫓겨서 등 적극적인 탈북 동기가 82%에 달했다. 그러면 절대다수 월남자들은 북한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체험했기에 고향조차 버렸던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가정법으로, 만약 월남자들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남한에서의 ‘북한관(觀)’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평양방송이 불어대는 소위 ‘민주개혁’의 성과로 북한은 이상적인 지상낙원처럼 비쳐질 판이었고,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선동선전에 현혹되어 남한의 민심도 북한체제를 추종해야 되는 것으로 왜곡될 판이었다. 월남자 대열이 형성되어 생지옥 같은 북한의 참상을 낱낱이 폭로함으로써 남한 국민들은 ‘안티 북한’의 지표를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
북한에서 살다가 6·25때 월남했다는 그는 "북한에는 언론, 집회, 종교 등 남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며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자아비판, 농민동맹 등을 수시로 해야했다…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
[...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 (2) 북한의 인상 ................................................ 6. 韓人 當路者들은 독립은 못 되었을 망정, 정권의 이양을 받았다고 만족해하는 동시에 傲驕한 태도가 현저한 것
8. 가로와 실내에 遍滿하게 金××과 스××의 사진을 모신 것
11. 전부가 인간성을 떠나 기계화한 것 12. 자유기분이 결여한 독재적 태도가 처처에 나타나는 것
제목 <南北協商을 비판 : 某黨의 결산서> 1948년 4월 미소 양군정하에 있어 자율적이란 입장으로 평양에서 개최한 남북정당단체대표자대회(소위 남북협상)는 好不好간에 후일 조선의 독립사상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이는 남북협상에서 귀경후 ×월 ×일, 모 당 ××위원회를 통과한 일부이며 익명 외 첨삭이 없음을 부언하여 둔다. ...............................................
--------------------------------------------------------------
1947.12.
............................................... 그리고 UN총회 석상에서 행한 미측 대표 덜레스씨의 발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가장 민주주의인 시책이 질서 정연하게 실시되고 있다는 북조선을 소련측이 UN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라는 것이었다.
.......................................................
북한에서 살다가 6·25때 월남했다는 그는 "북한에는 언론, 집회, 종교 등 남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며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자아비판, 농민동맹 등을 수시로 해야했다…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국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회라는 겁니다....]
............................................................... "북한은 인간다운 삶이 없는 곳이에요. 제가 있었던 15호 수용소 수감자들의 죄명만 해도 "김일성의 목에 혹이 났다"고 말한 사람, 김일성 석고상을 깬 사람, 김일성 초상이 있는 신문으로 장판을 바른 사람, 외국 비디오를 보거나 이웃에게 돌린 사람, 남한 방송을 들은 사람, 말실수 등 정말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죄도 될 수 없는 죄명으로 8년, 10년을 지내거나 또는 그 곳에서 영영 죽게 되는 겁니다"
김씨는 직장생활 외 자유롭게 여가를 보낼 수 있는 남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생활이라고 털어놓았다. 생활 속 세세로운 사항도 "청바지를 입지 말데 대하여" "두발을 단정하게 할데 대하여" 등의 "∼에 대하여"라는 수많은 교시가 내려와 생활총화를 통해 서로를 지적하면서 통제하는 구조라는 것. .............................................................
...............................................................
-------------------------------------------------------------
1948.8.25.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흑백선거
............................................................. 8월 25일 북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북한 지역 선거는 212 선거구에 227명의 입후보자가 등록했다. 이는 민전 후보에 반발해 일부 선거구에 복수 후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선거 방식은 흑백 찬반투표였다. 선거 결과 전체 유권자의 99.97%인 452만 4,942명이 투표했고, 민전 후보에 대한 찬성률은 98.47%였다. 이렇게 선출된 후보들은 북한 지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
찬성자는 그대로 함에 넣고 반대자는 「×」표를하여 투표함에 넣게 하고 있다. 따라서 감시자는 누가 「×」표를 하는지를 손쉽게 감시할 수 있도록 하여 1백% 찬성투표를 강요하고 있다.
..........................................................
................................................... 1949년 10월 초, 나는 파견 연구원들 그리고 파견 대학생들과 함께 평양을 떠났다. 두만강을 건너자 소련군용 트럭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워로실롭그라드 역’으로 태우고 갔다. 운전이 어찌나 난폭한지 차가 마구 요동을 쳐서 튼튼하지 못한 트렁크들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
1952년 헬싱키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을 때 북한군 고급 군관이 남조선으로 진격해 보니 물건이 산더미 같더라. 전쟁을 일으키기를 백번 잘한 것 같다고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지금도 북한은 전쟁 예비물자를 6개월분만 비축해 놓고 있으며 나머지는 '남한 점령지'의 물자를 빼앗아 쓸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도대체 남한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섭고 억압된 북한 사정을 상상이나 하는지?』
..................................................................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타의에 의해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해방된 지 5년, 공산 치하 북한에서 공산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계급은 있어서 안되며 全세계 인간은 평등해야 하며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공산당사를 줄줄 외우도록 공부했었다. 그러나 온 누리가 빨갛고 그 속에서 배운 것이 비록 마르크스 레닌의 유물사관이었다고는 하나, 이론과 현실의 모순성을 직접 보고 느꼈기에 결코 속속들이 붉게 물들 수 없었다. 죽음을 무릅쓴 많은 사람들이 38선을 넘기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남한에 의한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6·25 남침으로 공산군은 오히려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귀를 기울였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진군! 무슨 부대 어느 곳을 점령!』 의기양양한 인민군의 전황을 들으며 애꿎은 라디오만 두들긴다.
무더위 속에 라디오를 솜이불 안에 들여놓고 잡음 섞인 남한 방송을 초조한 마음으로 몰래 도청한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후퇴. 무슨 부대 무사히 어느 지점까지 철수!』 맥없이 밀려가는 남쪽 뉴스를 들으며 다시금 라디오를 두들긴다. 『도대체 남한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섭고 억압된 북한 사정을 상상이나 하는지?』
자꾸만 밀려가는 정세에 실망하며 그래도 매일같이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는 남한 비행기를 후련한 마음으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제트기 편대의 하늘을 찢는 소리, 공중을 선회하며 차례 차례 목표를 향해 급강하, 로켓 포탄의 작렬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몇 번인가 반복하고 전투기 날아가면 이윽고 고공비행의 폭격기 소리와 함께 점선을 그으며 줄지어 폭탄이 떨어진다. 기분 나쁜 바람과 함께 대지가 진동한다.
무섭고도 아름다운 야간 공중 폭격
밤은 밤대로 말로만 듣던 조명탄이 캄캄한 밤하늘에 보름달같이 둥글게 수없이 공중에 걸린다. 낮보다 더 밝은 밤에 공중 폭격이 시작된다.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꿈많던 소녀 시절이기에 둥근 조명탄이 아름다운 만월같이 터지는 폭탄의 불똥이 무수한 반짝이는 별들처럼 공포 속에 순간의 착각을 일으킨다. 9·28 수복. 마음이 떨린다. 戰勢(전세)가 호전되기만 바라며 차츰 치열해가는 전쟁, 그리고 폭격 속에 국군과 UN군의 전진을 기다린다. ............................................................. 10월에 접어들었다. 국군이 입성했다. 태극기를 들고 어른 아이 목청 돋워 만세를 부른다. 탱크 소리 요란하고 줄 잇는 군용트럭 그 양옆을 땀에 젖은 군복에 총부리를 겨누고 北으로 전진한다. 젊은 국군장병들과 UN병사들이 여유 있는 웃음 속에 윙크를 하며 손을 흔든다.
아버지 따라 대동강 다리 건너다
『우리도 가야지!』 ...............................................................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
..............................................................
그렇게 북쪽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도열한 가운데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해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탱크와 따발총을 그때 처음 보았다. 상상도 못해 본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탱크가 마치 양민들의 가슴팍을 밀고 들어오는 것 같은 공포감을 맛보았다.
그 후 공포의 나날이 계속됐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미군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뜨기 시작했다. 굶주림과 공포정치의 무서움을 그 여름의 혹서는 더욱 잔인하게 달구었고 혹서가 누그러질 무렵 서울 상공은 밤낮없이 미군 폭격기 차지였다. 오폭도 잦아 민가 밀집 지역이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구하러 교외로 빠져나가던 민간인들이 머리 꼭대기까지 하강한 전투기의 무차별 기총소사를 맞고 잔혹하게 살해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아마 따발총 맞고 죽은 수효보다 기총소사 맞고 희생된 민간인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열렬하게 미국의 병력이 이기라고 응원한 것은 따발총보다는 비행기가 더 강해 보이니까 이왕이면 강자 편에 붙으려는 비겁한 마음에서였을까. 아니다. 폭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정(虐政)이기 때문이었다. .......................................................................... 이념이라기보다는 꽃다운 나이에 6.25를 겪은 우리 세대 대부분의 평범한 노인들 공통의 정서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
전쟁이 시작되어 날짜가 흘렀는데 1차 진공 한다면서 많은 인민군 부대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가면서 밥을 해달라고 하여 마을 인민들은 상부의 지시에 의해서 무조건 밥을 해주게 되었다. 밥을 안 해주는 집은 반동이라고 하였다.
이때로부터 인민들은 인민군대를 무서운 사람들로 인정하게 되었다. ................................................................
그러면서 모든 선전들을 남조선에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을 계기로 전국이 다 휴식하는 짬을 리용하여 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