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연혁
자유공간
공연정보
창 고
사진첩
방명록
Link
산조
창작곡
정기연주
단원모집

제목 없음

2010/0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손님 : 3 명
- 회원 : 0 명
  • 전체 방문 : 2,017,656 명
  • 오늘 방문 : 0 명
  • 어제 방문 : 0 명
  • 전체 페이지뷰 : 2,111,081 회
  • 오늘 페이지뷰 : 0 회
  • 어제 페이지뷰 : 0 회
  • 총 멤버수 : 77 명
  • 총 게시물수 : 362 개
  • 총 코멘트수 : 129 개
  • DB 사용량 : 6.29 MB
  • 첨부파일 용량 : 79.55 MB
· Send : 7.9MB
· Limit : 2.9GB
전체글 수: 98
자유 공간입니다. 스팸사이트 홍보를 제외하고선 마음껏 자유롭게 글을 적어주세요 ^0^
부역에 동원돼 만두 여덟 개를 먹었다.
2010-07-01 23:30:11
처음 배불리

 

       부역에 동원돼 만두 여덟 개를 먹었다.


       처음 배불리

 

 

 

 

 


  *   [..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독립을 쟁취하고도, 정치·경제적 발전과 안정을 달성할 수 없었는가.


李光耀 선임장관은 『1960~1980년대까지 많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을 실패로 몰아간 것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라고 결론지었다. 국가개입 경제정책은 자원분배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부패를 심화시킴으로써, 開途國(개도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제3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환상에 사로잡혀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

 

월간조선
2000.12.

하버드에 온 李光耀의 특별 강연 

 

 

 

 

----------------------------------------------------------

 

 


 *

.....................................................


1958년에 제가 김일성과 함께 중국에 방문했는데, 그 때가 한창 인민공사를 할 때였습니다. 밥도 공짜로 먹고 이발하는 것도 전부다 공짜로 했습니다.

모택동이 말하기를 경지면적을 1/3로 줄이고, 1/3은 공원으로 만들고, 1/3은 목장으로 만들어도 쌀이 남아돈다고 했습니다. 그 비결은 깊이 갈고 빽빽하게 심는, 심경물식이라고 했습니다.

농업담당 중앙당 비서에게 금년에 얼마나 생산했냐고 물어봤더니 5억톤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해에 우리 중앙당으로 중국 고위인사가 찾아왔기에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말도 마십시오. 아사자가 너무 많아 내다 파묻을 수가 없어서 집 앞에 그냥 묻고 있습니다. 어떤 큰 부락들은 인구가 1/5로 줄었습니다. 쌀을 1억8천7백만톤 밖에 생산 못했습니다.”


 모두 밭에 나가서 낮잠만 자고, 심지어는 살구도 따서 같이 나눠먹을 바에는 차라리 살구나무를 찍어서 불이나 쬐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

 

 

 

 1975.12.28.  저우언라이 일기.
 

............................................................

"국가가 매우 불행하다. 건국 26년인데 6억 인구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

공산당만 노래하고 지도자 찬양만 하는데 이것은 공산당 실패의 한 장면이다." 
..........................................................

 


  *

..........................................................

그러나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만난 중국 유학생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놀랍게도 나는 모택동과 4인방을 지지하는 유학생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

 

 

  *

.......................................................

문혁 10년간 중국은 약 5000억 위안(약 100조 원)의 국내총생산(GDP)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중국 건국 이후 30년간 투자한 기초 인프라 건설비의 80%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다.

.......................................................

 

 

 


--------------------------------------------------------------

 


................................................

―언젠가 ‘만두를 배불리 먹고 싶어 작가가 됐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중국 경제는 매우 곤궁했다. 배고픔과 분리된 유년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먹는 걸 주 소재로 다룬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생에서 처음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열여덟 살 때다. 부역에 동원돼 만두 여덟 개를 먹었다. 뱃가죽이 늘어지도록 먹는 게 소원인 건 당연했다.”

....................................................

 

 


-----------------------------------------------------------------

 

 

  [... 우리끼리 속이고 우리에게 준 땅을 각자 사유하자...]

 

 

.....................................................

 여러분들은 인구 10억이 넘는 거대한 중국이 오늘과 같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 전체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중국 안희성이라고 하는 작은 성에 한 50여 가구도 안 되는 집에서 처음으로
인민공사를 벗어나서 우리끼리 속이고 우리에게 준 땅을 각자 사유하자. 그래서 거기 난 건 자기 것으로 하자 그리고 공출하는 건 같이 하면 될 것 아니냐.

그 몇 사람이 모여 가지고 했더니 인민공사는 자기가 만들어도 자기 게 아니고 제 땅이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했는데 네가 나와서 나누면 네가 가져라   밤 새워가며 비가 오면 우산 받고 하고 이렇게 해서 어마어마한 소출을 내니까 공출 다 하고 남는 것 엄청난 생산성을 가지니까 다른 동네는 다 굶주리는데 이 동네만 떵떵거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에서 조사 나왔습니다. 그게 등소평입니다.

그 모델을 보고 이게 살길이구나. 불과 몇 십 호 안 되는 그것이 10억 명을 넘는 오늘의 중국의 소위 사회주의를 하면서도 자본주의 경제를 들여올 수 있는 티핑 포인트가 되었다.

.....................................................

 

 

 


---------------------------------------------------------------

 

 

.....................................................


집단노동제도가 비효율적이었던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이른바 `감시 비용'이 높아 농민들의 적극성을 충분히 동원하기 어렵고 `무임승차' 현상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농업생산의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농민들이 그 정보를 제대로 이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이는 농업에서도 시장경제 제도가 계획경제 제도보다 효율적이라는 원론적인 문제에 귀결된다.

 

무슨 일에서나 모두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 결정을 하지 못하는 제도하에서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변 사람들과도 전혀 이해 관계가 없는 생산활동에 대해 창의성이나 노력을 발휘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개혁 이전에 정부가 옥수수를 많이 심으라고 하면 농민들은 경작지의 토양 조건이 옥수수 재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조건 따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생산노동 자체에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 하남성의 한 농촌에서는 1958년에 모택동이 시찰한 적이 있는 한 뙈기의 면화 시험밭이 있었다. 비록 농민들은 생산 경험으로부터 같은 땅에 계속 면화를 심으면 생산량이 크게 감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모택동이 시찰했던 면화 시험밭에 다른 곡식을 심으면 문책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개혁 이전까지 20년 이상이나 계속 면화만 심어 왔다. 또 면화 생산량이 너무 낮으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해마다 갈수록 많은 인력과 비료 및 농약을 낭비해 가면서 모택동이 시찰했던 면화 시험밭이라는 `간판'을 계속 지켜야 했다.

 


이러한 이치를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터득한 중국의 농민들은 자연히 집단노동방식보다 `가정 경영책임제'를 선호하게 된다. 그렇지만 모택동 시대에는 집단노동방식을 이탈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자본주의' 방식으로 간주되어 엄격한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감히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사망한 후 중국에서 이데올로기 통제가 약간 풀리자 농민들은 곧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가정 경영책임제'를 실험해 보려고 나서게 되었다.
 1978년 12월에 안휘성 봉양현(鳳陽縣) 소강촌(小崗村)의 18명의 농민들은 처음으로 정부 몰래 집단소유의 토지를 가정별로 나뉘어 경작하는 `가정 경영책임제'를 실험할 것을 결심했다. 이들은 심지어 정부에 발각되어 그 주모자가 감옥에 갈 경우 다른 사람들이 그 가족의 생활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의 원시적인 계약서를 작성하여 손도장을 찍기까지 했다.

 

이처럼 모택동 사망 후인 1978년까지도 농민들이 집단노동제도를 이탈한다는 것은 실로 비장한 모험이었다. 현재 이 원시적인 내용의 계약서는 중국 농업개혁의 최초의 역사적 문헌으로 간주되어 북경의 중국역사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

 

 

 


-------------------------------------------------------------

 

 


 [...동독 전체 인구 1천6백4십만 중에서 3백5십만이 동독을 떠났으며.....]

 


.......................................................

맑스·레닌주의에 의하면 공산주의 사회에는 반대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사회는 하나의 사회주의 국가로서 반대계급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독 역사는 늘 사회주의 통일당(SED) 독재에 대한 거절, 반대, 저항의 역사로 점철 되었다. 그것은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피난 또는 이주한 숫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1945년 10월 동독의 설립에서 1989년11월 베를린장벽 붕괴까지 동독 전체 인구 1천6백4십만 중에서 3백5십만이 동독을 떠났으며, 8백명은 도주의 노력에서 실패 하였다. 이와 같은 동독인들의 탈출은 사회주의 통일당(SED) 독재의 불정당화 및 불안정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셈이다.

.........................................................

 

 

 


--------------------------------------------------------------

 

 

.....................................................


자유자본주의는 지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제도

 

누가 어떤 재화를 좋아하는지, 생산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생산가능성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누가 어떤 생산기술과 재주, 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관한 지식은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의 각처에 흩어져 존재한다. 하이에크는 이를 지식의 분산(division of knowledge)이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이러한 지식의 대부분은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개인들은 이러한 지식을 기초로 하여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첫 번째 문제는 개개인들이 서로 다른 지식을 기초로 하여 세운 계획들을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국외자인 국가 계획당국이 이 계획들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각처에 흩어져 존재하는 지식을 전부 수집하여 가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계획당국자는 누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이 모든 지식을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유시장 경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지식의 문제 때문에 계획경제는 비효율적이기는 고사하고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 하이에크를 비롯한 오스트리안 학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다. 누구도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


나치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서방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의 좌파지식인들도 나치즘과 같은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나치즘의 뿌리는 사회주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고, 또한 나치즘은 집단주의로서의 사회주의가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또 다른 형태로 재현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경제학과 지식}이라는 논문보다 평이한 문체로 {노예로의 길}에서 자유자본주의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현대적인 사회 경제적 분업의 복잡성 때문에 중앙의 계획당국이 계획을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수없이 많아서 이들을 총괄적으로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경제주체들이 자유롭게 결정되는 가격에 대해 각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기초하여 개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자유 시장경제는 중앙 계획당국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방법으로 수많은 새로운 지식들을 발견하고 확산시켜, 이를 전 사회에 유통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1945년 {사회에서의 지식의 활용}(이 논문은 {개인주의와 경제질서}에 수록)이라는 논문에서 더욱 더 심화시킨다. 그는 시장경제를 거대한 의사소통 체계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시장경제의 경쟁을 모든 사회악의 근원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자유경쟁을 복권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세계에서는 경쟁은 필요가 없다.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경우에서만 경쟁은 의미가 있다. 그는 경쟁은 몰랐던 사실을 발견하는 발견적 절차라는 것을 규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경쟁은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잘못된 지식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절차이다.


시장의 중요성을 오늘날 좌파들이나 우파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좌파들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전혀 다르다. 그들에 의하면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일하려는 의욕을 억제하고, 따라서 인센티브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비효율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이 부분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파에 속하는 사람들마저 이러한 좌파적 시각과 동일한 시각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반대한다.

 

계획경제는 비효율적 제도가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제도

 

그러나 하이에크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 계획경제(뿐만 아니라 부분적인 계획도)는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 그것이 개인적 자유를 소멸시키고 전체주의를 야기한다는 이유 이외에도 - 이 점이 특히 중요한 이유인데, 사회주의 계획경제 그 자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제과정을 의식적으로, 즉 목적 지향적으로 통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어떠한 정신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불가능성을 해결하는 것이 자유를 기초로 하는 시장경제의 발견적 절차라는 것이다.

.............................................................

 

 

 

 

----------------------------------------------------------------

 

 


      [  공산주의 사회 = 이밥에  고기국  ]

 


........................................................................


김일성은 인민들이 모두 흰쌀밥에 고기 국을 먹으로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살게 되면 인류의 이상사회인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세계에서 평양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하면서 평양은 도시 안에 공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원 안에 도시가 있다고 말하였다.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의 이 말을 그대로 믿고 있다. 흰쌀밥에 고기 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사는 것이 그리도 높은 생활수준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

 

 

북한서 사업하는 건 광주리로 물 퍼내기
 

 


 
  <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나의 가슴속에 의문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은 1982년인가 1983년부터였다. 최초에는 조그마한 의심이었다. 그 뒤로 북조선 본국과 在日동포 사이에는 합작사업이 시작되었다. 1984년 9월 合營法(합영법)이 만들어지고, 라면 공장에서부터 중금속 공장에 이르기까지 100개가 넘는 공장이 북조선 각지에 세워졌다.
 

  金日成의 말씀이 있었던 1986년 9월에는 북조선으로부터 合營經濟代表團이 일본에 와서 朝鮮國際合營總會社의 설립 조인식을 가졌다. 자본금은 약 120만 달러로 기억한다. 朝·日이 각각 50%씩 출자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는 거의 전액을 일본 측이 내놓았다.

 
  朝鮮國際合營總會社 설립 후의 계획은 피복 가공, 실크 넥타이 제조, 직물 제조, 모피 가공, 프레스 가공, 케미컬 슈즈 제조, 필터 담배 제조, 축산가공, 피아노 제조, 디지털 시계 제조, 녹음기 제조, 컬러 TV 제조였으며 얼마 뒤에는 공장도 건설했다.
 
  그러나 투자에 대한 이익 환원이 전혀 없었다. 공장도 처음 얼마 동안 가동하다가 2년인가 3년 사이에 조업이 중지되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북조선이란 국가 전체가 관료주의로 병들어 사업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인건비는 저렴하지만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노동자를 만들어 내려면 방대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를 파견하는 관료들이 리베이트를 요구해 왔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가격이 비싸게 되었다. 그리고 인프라 정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電力에서 철도까지 모두가 黨 간부가 그 권리를 독점하고 있어 공장이 잘 될 만하면 옆구리를 치고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공장의 간부들이 『내 몫도 내놓으라』고 나섰다. 약탈자는 黨만이 아니다. 軍도 덤벼든다.

 
  예산에 대해서도 이해가 없어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써버린다. 투자금이 있으면 초장에 몽땅 써버린다. 부품의 수명이나 잉여자금을 축적한다는 것은 발상 자체가 없다. 돈이 있으면 자가용 차를 사고 간부용 휴양시설을 마련한다. 北朝鮮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광주리로 물 퍼내기다. 在日동포가 투자한 수백억 엔의 돈이 이렇게 해서 간데 온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
 

 

 


---------------------------------------------------------------

 

 

제목 : 귤이 아니라 사과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데

 

 


간부들이라고 해서 일반 주민에 비해 낫다는 것이지 그들도 굳이 남한과 비교하자면 대망님의 말이 맞습니다.

귤을 사계절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김정일과 김용순정도 일것입니다. 아마 김용순도 자기가 먹고싶을때 귤을 먹을 수 있을런지는 잘모르지만...

남한에 와서 사계절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란적이 있었어요..

여기서 노가다 하는게 북한에서 장관하는 것 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아무리 서민이라도 외국에도 마음대로 나가고 하루벌지라도 돈만 좀 있으면 얼마든지 먹고싶은 것을 먹을 수 있으니까...아마 김용순이도 외국가자면 김정일의 승인이 없으면 절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

 

 

[...북에서는 약에 쓰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그 탐스러운 참외들이 이국의 정서를 풍기고 있었다.....]

 

 

.............................................................


중국땅의 참외밭을 보고 감격하다

 

우리 모녀가 ‘가다가 죽으면 죽는 게지!’ 하는 비장한 결심을 품고 산을 내려와 두만강물에 들어선 것은 1997년 8월15일 새벽 2시경이었다. 두만강 감탕물을 꼴깍꼴깍 먹으며 익사의 경계선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중국땅에 올랐다. 누가 볼세라 강기슭의 무성한 강냉이밭에 들어간 우리 모녀는 잠깐새에 국경을 넘었다는 것이 꿈만 같아서 ‘이게 중국땅이 옳긴 옳은가?’하고 의심이 다 생겼다.


강냉이 밭을 헤치며 앞서가던 딸애가 “엄마, 여기 참외밭이 있어” 하고 탄성을 질렀다. 서둘러 다가가서 보니 정말 참외밭이었다. 권투장갑만큼이나 큰 노란 참외가 새벽빛을 안고 여기저기서 그윽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국땅이 옳구나!”


북에서는 약에 쓰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그 탐스러운 참외들이 이국의 정서를 풍기고 있었다.

......................................................

 

 

 


    *

.....................................................

남한에는 동네슈퍼에 가도 설탕이 있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북한에서는 어린이들이 감기에 걸리면 어머니가 ‘귀한 약’으로 한 숟가락씩 뜨거운 물에 정성껏 타먹이는 것이 설탕이다.
.....................................................

 

 

 


-----------------------------------------------------------------

 

............................................................

평양에서 묘향산까지 나무가 하나도 없는 거야. 식량 자급자족하겠다며 산을 깎아 다 밭으로 만들었는데 그래 봐야 식량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고 허구헌날 홍수만 나는 거야. 오히려 식량난을 악화시키고 있는 거지.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북한에 나무 심기 운동이라니까.(웃음)
.............................................................

 

 

 


======================================================================

 

 

.....................................................


실향민 단체의 부설 연구소에서 지난 90년대에 ‘이북도민의 월남동기 및 월남시기’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통계를 볼 수 있었다.

실향민 1세(직접 월남 당사자) 1030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귀하가 월남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ㆍ북한공산통치를 체험하고 공산당이 싫어서 … 50.8%

ㆍ북한에서 반공투쟁을 하다가 피신 또는 탈출하여 … 16.1%

ㆍ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자본가, 지주 종교인 등)로 찍혀서 …15.1%

ㆍ어린 나이였으므로 그저 어른들 손에 이끌려서 … 3.2%

ㆍ기타 10여 가지 이유의 합계 … 14.8%
........................................................

 

 

 

 

----------------------------------------------------------------

 

 

............................................................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하고 나서 농민들은 좋아했을 것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땅을 받은 농민을 제외하고는 다 불만이었지요.

그런데다가 막상 수확을 할 때가 되자 북한정권은 일제하 공출보다 더 많은 비율로 수확물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면서 농민들의 마음도 돌아섰지요.”

.......................................................

 

 


...................................................................

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세력은 상당수 북한을 탈출하고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반발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반발세력이 생성된 것이다. 토지개혁 이후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갔기 때문이다.


북한은 토지개혁 후 당해연도의 산물에 대하여 농업현물세제를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25%를 징수하도록 하였으나 이 수치는 법령상의 규정일 뿐이었다. 농업현물세뿐만 아니라 애국미, 성출 등 잡세로 인하여 실제로는 40% 정도를 납부해야 했다. 북한의 농민들이 낸 각종의 잡세는 토지개혁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인지주제에서 국가지주제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은 도시나 농촌에서 기아가 속출하는 현황이었다고 한다.

...................................................................

 

 

 


------------------------------------------------------------------

 

 

.....................................................

그런데 북에서는 소련군의 비호와 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 일파가 1946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한 후 공산주의체제 구축에
본격 착수하여 지주와 부농계급의 재산을 몰수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토지개혁은 대지주, 중농, 자작농, 소작인들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평온한 마을공동체에 급격한 사회변혁을 가져왔다. 현물세나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변혁은 경제체제 면에서 농민들의 불만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현물세는 이전의 소작제보다도 더 가혹할 정도로 높은 비율이었다. 특히 지주와 부농계층이 겪게 된 재산상의 박탈과 심적 당혹감은 매우 컸다. 당시 북한공산정권은 3할 4부의 현물세를 징수하는 외에, 해방의 ‘은인’인 소련군에게 헌납한다는 명분으로 ‘성충미’와 ‘애국미’의 명목으로 세금을 강제 징수하였다.

 

북한정권은 자신들이 실시한 초기 사회주의정책에 방해가 되는 지식인, 종교인, 지방유지들로 구성된 자치회나 치안대의 지도자들
을 민족의 반역자나 반동분자로 몰아 공산정권에 맹종하는 단체조직인 공산청년동맹 적위대들의 폭력으로 강제추방하거나 불법투
옥, 학살 그리고 추방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또 공산주의사상을 강제로 전파하기 위하여 ‘맑스­레닌’
의 우상화교육과 이에 방해가 되는 종교탄압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종교적인 탄압을 피하여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으로 월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탈출의 기회를 놓쳤거나 가족사정으로 월남할 수 없었던 반공주의자들은 도피의 세월을 보내야 하였다.

.....................................................

 

 

 

 

-------------------------------------------------------------------

 

 


 1946.3.6.  38선 철폐요구 국민대회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개최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06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가 5일 오전 11시 반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38선철폐요구국민대회에 군중이 들고 나선 기치와 표어는 다음과 같다.

 

38絞首線 撤廢

38以北의 農民의 食糧을 약탈 말라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自主獨立의 전제조건이다

38以北의 機械없는 공장의 노동자를 살리자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言論機關은 반성하라 38以北의 진상을 정확히 報道하라

民族의 總意로 38線 撤廢를 요구하자

 


이날 오전 11시 반 대회장에는 남북 각지에서 모인 수천명이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絞首線을 철폐하라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38선의 철폐에 돌진하려는 결의가 움직이는 가운데 대회의 막이 열리었다.


개회사와 국기게양이 끝난 다음 애국가 합창이 성동중학교의 취주악대와 함께 있은 후 대회위원장 李允榮(平壤朝鮮民主黨副黨首)으로부터 “38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 우리의 완전독립은 가망없다. 우리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38선철폐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 한다”라는 개회사가 있었다.

그 다음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으로부터 李承晩, 金九의 축사를 대독한 후 서북선의 실정보고에 들어가 宋義淳, 崔奎恒, 白凡石 3인의 보고연설에 이어 다음과 같은 決議文 낭독이 있은 후 독립만세 삼창으로서 의의깊은 대회의 막을 닫고 동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


     決議文

 

1) 朝鮮의 38도선은 外敵이 항복하기 전 聯合軍參謀總長會議에서 작전상의 필요로 획정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금일의 朝鮮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치 아니한다. 이 후도 美蘇兩軍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주둔하여 현재와 같은 3천만 민족의 統一團結과 自主國家 건설에 지장이 클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파멸을 초래하여 國民生活을 도탄에 빠지게 하며 政治·經濟 文化·交通·通信·居住의 자유를 拘?하는 바 큼으로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聯合軍과 聯合軍總司令官 及 美蘇共同委員會에 대하여 38선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여 其 목적의 관철을 기하기를 결의함.


1) 우리 동포중에는 □□을 기화로 선량한 동포들을 기만 □□하여 政權의 획득을 꾀하는 賣國奴가 있어서 심지어 光輝있는 祖國을 外夷에게 팔아 먹으려는 □□□ 이땅에서 횡행 활보하니 어찌 통탄치 아니하랴.

 38以北을 바라보건대 진정한 民意를 무시하고 소수인원의 恣意로 된 臨時人民委員會가 있어 입으로 民主主義를 표방하면서 민중을 억압 기만하여 후일 政權의 횡탈을 꾀하려 하니 우리 어찌 만연 방관할 수 있으랴.

이제 우리 3천만 동포는 理論과 표방에 속지 말고 사리와 감정을 떠나서 현실을 엄정 냉정히 관찰하여 정사를 가르고 □□을 판단하여 우리의 추앙 신앙하는 民族의 領導者를 선택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朝鮮의 血統과 民族的 良心을 가진 3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절대 지지하는 것을 천하에 선명하여 써 內로는 民心의 歸一을 策하며 外로는 이를 萬邦으로 하여금 大韓國民의 完全統一政權으로 승인케 하기를 결의함.

 

 
大韓民國 28년 3월 5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


   1946.3.18.월요일. 동아일보.

 " 라듸오"로 듯는 이남의 소식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심정은 오즉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번 , 미소회담에서 방송파장이 협정되면서부터 라듸오만은 잘들리어 , 서울중앙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뉴스로서 자위한다고 한다.

 

 

 

 


  *  [....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

      ....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1945.9.12.  매일신보 .


 하지, 기자회견에서 미군 施政方針을 발표

 


11日 오후 2시 40분 존R.하지중장은 아놀드소장과 헤이워드중좌를 대동하고 시내 각 대표신문기자들과의 회견석상에서 제1성을 발하였는데 (略)사령관과의 회담은 2시간 40분에 亘하였으며 (略) 이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미군이 진주해 온 후인 현재 조선에는 문자 그대로의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미군은 조선사람의 사상과 의사발표에 간섭도 안하고 방해도 안할 것이며 출판에 대하여 검열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언론과 신문의 자유는 여러분들을 위하여서 대중의 論을 제기하고 또한 여론을 소소하게 알리는데 그 직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미군은 언론자유에 대하여 취재를 방해하고 검열을 하려하지는 않으나 그것의 정당한 의미의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이런 경우는 별도로 강구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필요까지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조선에 온 뒤로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신문사를 통해서 조선이 어떠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만큼 나는 바라노니 부디 여러분은 이 기회를 조선신문사상의 일대 혁신전환단계로 삼아 주기를 바란다.

미국의 제 신문과 같이 신문의 역할을 다 하는데 있어서는 대중을 지도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

 

 

 


--------------------------------------------------------------

 

 


1947.3.28. 금요일 동아일보

 

남쪽 차저 온 북조선동포

매일 평균 천5백명을 돌파

 


봄을 찾어 38선을 넘어 오는 우리 겨레의 피난동포들은 16개소의 검역소에서 검역? 구호를 실시하고 있는데 동두천 방면으로부터 매일 평균 9백여명 청단 방면으로부터 2백여명이 드러오고 있으며 그외의 산간협로를 거처 들어오는 동포도 만호므로 매일 평균 1천 5백명이 남조선으로 드러 오고 있는 형편이다.


검역소의 조사

 

 


1947.7.1. 화요일  동아일보

 

5월에 북쪽에서 온 동포

7만6천6백여명

 

보건후생부 발표에 의하면 지난 5월중 38선을 건너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으로 넘어 온 동포들에게 개성을 비롯한 6개 집결지 검역소에서 시행한 검역성적은 다음과 같다.


예방주사인수 35,389

소독인원수 38,786

보통병자수  1,968

전염병자수


합계 76,654

 

 

 


--------------------------------------------------------------

 

 


 [....월남자 대열이 형성되어 생지옥 같은 북한의 참상을 낱낱이 폭로함으로써 남한 국민들은 ‘안티 북한’의 지표를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


월남이 건국 이정표의 단초

 

실향민 단체의 부설 연구소에서 지난 90년대에 ‘이북도민의 월남동기 및 월남시기’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통계를 볼 수 있었다. 실향민 1세(직접 월남 당사자) 1030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귀하가 월남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ㆍ북한공산통치를 체험하고 공산당이 싫어서 … 50.8%

ㆍ북한에서 반공투쟁을 하다가 피신 또는 탈출하여 … 16.1%

ㆍ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자본가, 지주 종교인 등)로 찍혀서 …15.1%

ㆍ어린 나이였으므로 그저 어른들 손에 이끌려서 … 3.2%

ㆍ기타 10여 가지 이유의 합계 … 14.8%

 

이 통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산북한 체제에 등을 돌리거나 반동으로 쫓겨서 등 적극적인 탈북 동기가 82%에 달했다. 그러면 절대다수 월남자들은 북한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체험했기에 고향조차 버렸던 것인가.


그들은 소련군의 노략질과 폭행을 보았다. 가짜 장군 김일성의 독재를 보았고 자유민족진영에 대한 탄압을 보았다. 공산체제의 강화와 토지개혁의 기만성을 보았고, 종교박해를 겪었으며, 정치보위부라는 비밀경찰에 신경을 써야 했고, 공산당 외곽단체 강제 가입 강요에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 김구 등 민족계 지도자에 대한 악의적 성토를 줄곧 들어야 했으며, 인민군의 강화로 남침 준비에 광분하는 낌새를 감득할 수 있었다.


월남자들이 전하는 북한의 실상을 한마디로 ‘생 지옥’같은 세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가정법으로, 만약 월남자들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남한에서의 ‘북한관(觀)’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평양방송이 불어대는 소위 ‘민주개혁’의 성과로 북한은 이상적인 지상낙원처럼 비쳐질 판이었고,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선동선전에 현혹되어 남한의 민심도 북한체제를 추종해야 되는 것으로 왜곡될 판이었다. 월남자 대열이 형성되어 생지옥 같은 북한의 참상을 낱낱이 폭로함으로써 남한 국민들은 ‘안티 북한’의 지표를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월남자들의 발걸음이야말로 자유대한을 건국하는 이정표의 첫걸음이었다고 말하는 소이가 거기에 있다.

.....................................................

 

 

 


  *


..........................................................

북한에서 살다가 6·25때 월남했다는 그는 "북한에는 언론, 집회, 종교 등 남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며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자아비판, 농민동맹 등을 수시로 해야했다…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이어 "나도 군생활을 10년 했지만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라면서 "아마 휴전선에 구멍이라도 나면 이북엔 사람들이 한명도 없을 것…다 넘어오지"라고 덧붙였다.

...........................................................

 

 

 

 

[...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   1948.4.  [  南北協商  참가 某黨의 결산서  ]

 

......................................................

(2) 북한의 인상

................................................

6. 韓人 當路者들은 독립은 못 되었을 망정, 정권의 이양을 받았다고 만족해하는 동시에 傲驕한 태도가 현저한 것


7. 한인 당로자들의 소련과 소련인에 대한 호감은 우리 조상들의 明에 대하였던 그것과 꼭 같은 것

8. 가로와 실내에 遍滿하게 金××과 스××의 사진을 모신 것


9. 전시 기분이 충만하여 투쟁목표를 확정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국제적으로는 미국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국내적으로는 ×××박사와 金××씨를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수괴로 지정한 것


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있는 것

11. 전부가 인간성을 떠나 기계화한 것

12. 자유기분이 결여한 독재적 태도가 처처에 나타나는 것
........................................................

 

 

 

제목 <南北協商을 비판 : 某黨의 결산서>
 
 
게재지명 조선일보
 
게재일자 1948년 10월 10일
 
 
 

1948년 4월 미소 양군정하에 있어 자율적이란 입장으로 평양에서 개최한 남북정당단체대표자대회(소위 남북협상)는 好不好간에 후일 조선의 독립사상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

 이는 남북협상에서 귀경후 ×월 ×일, 모 당 ××위원회를 통과한 일부이며 익명 외 첨삭이 없음을 부언하여 둔다.

...............................................

 

 

 

 

--------------------------------------------------------------

 

 

  1947.12.


 [... 북조선을 소련측이 UN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

그리고 UN총회 석상에서 행한 미측 대표 덜레스씨의 발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남조선에서의 미군 또는 미 과거의 업적이나 실패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蘇측이 비판하는 바 많은 남조선미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을 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주저치 않는 바다.

그런데 가장 민주주의인 시책이 질서 정연하게 실시되고 있다는 북조선을 소련측이 UN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라는 것이었다.
.............................................

 

 
제목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중국대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대해 언명
 
 
게재지명 조선일보,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7년 12월 28일
 
 
 
조선파견 UN위원 중국대표 劉馭萬(유어만) 환영회는 26일 하오 6시부터 국제외교연구소 주최로 天香園에서 성대히 열리었는데 석상 劉씨는 UN위원단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

북한에서 살다가 6·25때 월남했다는 그는 "북한에는 언론, 집회, 종교 등 남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며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자아비판, 농민동맹 등을 수시로 해야했다…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이어 "나도 군생활을 10년 했지만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라면서 "아마 휴전선에 구멍이라도 나면 이북엔 사람들이 한명도 없을 것…다 넘어오지"라고 덧붙였다.

...........................................................

 

 

 

  
   [...북한주민의 생활 속엔 자유시간이 없다고 ....]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국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회라는 겁니다....]

 

...............................................................

"북한은 인간다운 삶이 없는 곳이에요. 제가 있었던 15호 수용소 수감자들의 죄명만 해도 "김일성의 목에 혹이 났다"고 말한 사람, 김일성 석고상을 깬 사람, 김일성 초상이 있는 신문으로 장판을 바른 사람, 외국 비디오를 보거나 이웃에게 돌린 사람, 남한 방송을 들은 사람, 말실수 등 정말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죄도 될 수 없는 죄명으로 8년, 10년을 지내거나 또는 그 곳에서 영영 죽게 되는 겁니다"


 김씨는 모든 생활이 당과 조직에 얽매여 있는 북한주민의 생활 속엔 자유시간이 없다고 설명했다. 학습, 총회, 수요강연회, 생활총화 등 일주일 단위로 모든 조직활동이 짜여져 있다. 한 사람 당 직장에서, 당조직에서, 그리고 동네 인민반장에게 3중으로 통제를 당하게 된다.

김씨는 직장생활 외 자유롭게 여가를 보낼 수 있는 남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생활이라고 털어놓았다. 생활 속 세세로운 사항도 "청바지를 입지 말데 대하여" "두발을 단정하게 할데 대하여" 등의 "∼에 대하여"라는 수많은 교시가 내려와 생활총화를 통해 서로를 지적하면서 통제하는 구조라는 것.

.............................................................
 
 김영순씨가 느끼는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김씨가 거론한 '감동'들은 대부분 너무나 당연해 남한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생활 속의 작은 부분들이었다.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국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회라는 겁니다. 경찰서에 붙어있는 '최상의 치안서비스를 위해서'라는 말이나 공사장에 붙어있는 '불편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보고 정말 울었습니다. 모든 것이 체제우선인 북한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거든요."

...............................................................

 

 

 

-------------------------------------------------------------

 

 

1948.8.25.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흑백선거

 

 

.............................................................

 8월 25일 북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북한 지역 선거는 212 선거구에 227명의 입후보자가 등록했다. 이는 민전 후보에 반발해 일부 선거구에 복수 후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선거 방식은 흑백 찬반투표였다. 선거 결과 전체 유권자의 99.97%인 452만 4,942명이 투표했고, 민전 후보에 대한 찬성률은 98.47%였다. 이렇게 선출된 후보들은 북한 지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

 

 


............................................................


한편 선거에서 투표율과 찬성율을 보면 제3기 대의원부터 1백% 투표에 1백% 찬성을 선전해오다가 최근 9기, 10기 선거부터는 99.78%, 99.9% 투표, 1백% 찬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선거에서 1백% 찬성이란 있을 수 없다. 결국 1백% 찬성이란 북한 헌법에 일반, 직접, 평등, 비밀선거를 규정(제89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자유의사에 의해 투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2기 대의원 선거에서는 찬성자는 백함, 반대자는 흑함에 넣는 흑백함식 투표함제를 채택하였으나 1962년 3기 선거이래 단일투표함제로 바뀌었다.

찬성자는 그대로 함에 넣고 반대자는 「×」표를하여 투표함에 넣게 하고 있다. 따라서 감시자는 누가 「×」표를 하는지를 손쉽게 감시할 수 있도록 하여 1백% 찬성투표를 강요하고 있다.


대의원은 인구 3만명당 1인의 비율(제1, 2기는 5만명당이었음)로 선출된다

..........................................................

 

 

 


--------------------------------------------------------------

 

 

...................................................

1949년 10월 초, 나는 파견 연구원들 그리고 파견 대학생들과 함께 평양을 떠났다. 두만강을 건너자 소련군용 트럭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워로실롭그라드 역’으로 태우고 갔다. 운전이 어찌나 난폭한지 차가 마구 요동을 쳐서 튼튼하지 못한 트렁크들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역에서 돼지비계가 둥둥 떠 있는 고깃국이 나왔다. 몇 해 만에 처음으로 먹어보는 고깃국이라 기대를 하면서 달려들었는데,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어 실망했다.
.....................................................

 

 

 

---------------------------------------------------------------

 


....................................................

1952년 헬싱키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을 때 북한군 고급 군관이 남조선으로 진격해 보니 물건이 산더미 같더라. 전쟁을 일으키기를 백번 잘한 것 같다고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지금도 북한은 전쟁 예비물자를 6개월분만 비축해 놓고 있으며 나머지는 '남한 점령지'의 물자를 빼앗아 쓸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

 

 

------------------------------------------------------------

 

 


『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도대체 남한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섭고 억압된 북한 사정을 상상이나 하는지?』

 

 

 

 

..................................................................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타의에 의해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해방된 지 5년, 공산 치하 북한에서 공산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계급은 있어서 안되며 全세계 인간은 평등해야 하며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공산당사를 줄줄 외우도록 공부했었다.

그러나 온 누리가 빨갛고 그 속에서 배운 것이 비록 마르크스 레닌의 유물사관이었다고는 하나, 이론과 현실의 모순성을 직접 보고 느꼈기에 결코 속속들이 붉게 물들 수 없었다. 죽음을 무릅쓴 많은 사람들이 38선을 넘기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남한에 의한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6·25 남침으로 공산군은 오히려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귀를 기울였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진군! 무슨 부대 어느 곳을 점령!』

의기양양한 인민군의 전황을 들으며 애꿎은 라디오만 두들긴다.


『북쪽만 가지고 모자라 남쪽까지 빨갱이를 만들겠단 말인가?』

무더위 속에 라디오를 솜이불 안에 들여놓고 잡음 섞인 남한 방송을 초조한 마음으로 몰래 도청한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후퇴. 무슨 부대 무사히 어느 지점까지 철수!』

맥없이 밀려가는 남쪽 뉴스를 들으며 다시금 라디오를 두들긴다.

『도대체 남한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섭고 억압된 북한 사정을 상상이나 하는지?』

 

자꾸만 밀려가는 정세에 실망하며 그래도 매일같이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는 남한 비행기를 후련한 마음으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제트기 편대의 하늘을 찢는 소리, 공중을 선회하며 차례 차례 목표를 향해 급강하, 로켓 포탄의 작렬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몇 번인가 반복하고 전투기 날아가면 이윽고 고공비행의 폭격기 소리와 함께 점선을 그으며 줄지어 폭탄이 떨어진다. 기분 나쁜 바람과 함께 대지가 진동한다.

 

무섭고도 아름다운 야간 공중 폭격

 

밤은 밤대로 말로만 듣던 조명탄이 캄캄한 밤하늘에 보름달같이 둥글게 수없이 공중에 걸린다. 낮보다 더 밝은 밤에 공중 폭격이 시작된다.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꿈많던 소녀 시절이기에 둥근 조명탄이 아름다운 만월같이 터지는 폭탄의 불똥이 무수한 반짝이는 별들처럼 공포 속에 순간의 착각을 일으킨다.

9·28 수복. 마음이 떨린다. 戰勢(전세)가 호전되기만 바라며 차츰 치열해가는 전쟁, 그리고 폭격 속에 국군과 UN군의 전진을 기다린다.

.............................................................

10월에 접어들었다. 국군이 입성했다. 태극기를 들고 어른 아이 목청 돋워 만세를 부른다. 탱크 소리 요란하고 줄 잇는 군용트럭 그 양옆을 땀에 젖은 군복에 총부리를 겨누고 北으로 전진한다.

젊은 국군장병들과 UN병사들이 여유 있는 웃음 속에 윙크를 하며 손을 흔든다.
쫓겨가는 인민군, 전진해가는 국군 다 같은 우리네 귀한 아들들인데 그들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과 생각이 평등하지 않았다. 인민군을 미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국군에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공산체제를 싫어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5년 간의 억압 속에서의 나온 마음의 발로였다. 겁먹고 쫓기는 인민군, 뒤쫓는 국군. 同族(동족)끼리의 이 가슴 아픈 현실이 UN군의 진격으로 통일로 이어지길 바랐던 희망과 기쁨도 잠시, 북 치고 피리 불며 압록강을 건너 중공군이 물 밀듯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우리 북한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전세는 다시 바뀌었다. 추위와 피로에 지친 국군과 UN군이 묵묵히 철수하기 시작했고 인민군은 또다시 총부리를 겨누고….

 

아버지 따라 대동강 다리 건너다


찬바람 부는 겨울날 길을 메우며 피난민 대열이 이어졌다.

『우리도 가야지!』

...............................................................

 

 

 


-------------------------------------------------------------------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

 

 

 

..............................................................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청소년들이 흔히 그랬듯 이북이 사회주의 낙원이란 선전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바뀐 세상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려고 했다. 나는 전혀 두려움 없이 바뀐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는 빈손이었지만 그 사이에 붉은 깃발까지 준비한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북쪽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도열한 가운데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해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탱크와 따발총을 그때 처음 보았다. 상상도 못해 본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탱크가 마치 양민들의 가슴팍을 밀고 들어오는 것 같은 공포감을 맛보았다.

 

그 후 공포의 나날이 계속됐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미군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뜨기 시작했다. 굶주림과 공포정치의 무서움을 그 여름의 혹서는 더욱 잔인하게 달구었고 혹서가 누그러질 무렵 서울 상공은 밤낮없이 미군 폭격기 차지였다. 오폭도 잦아 민가 밀집 지역이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구하러 교외로 빠져나가던 민간인들이 머리 꼭대기까지 하강한 전투기의 무차별 기총소사를 맞고 잔혹하게 살해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아마 따발총 맞고 죽은 수효보다 기총소사 맞고 희생된 민간인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열렬하게 미국의 병력이 이기라고 응원한 것은 따발총보다는 비행기가 더 강해 보이니까 이왕이면 강자 편에 붙으려는 비겁한 마음에서였을까. 아니다. 폭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정(虐政)이기 때문이었다.

..........................................................................

이념이라기보다는 꽃다운 나이에 6.25를 겪은 우리 세대 대부분의 평범한 노인들 공통의 정서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

 


박완서 소설가
.
2005.06.21

 

 

 

 

---------------------------------------------------------------

 

 

 
  인민학교 3학년, 전쟁의 실상

 

 


  [....집단 로동을 하니까 모두 일을 안 하고 건달만 부려 농사들은 전반적으로 패만하였다.


.... 말 마디나 좀 하고 바른 말을 하여 정당한 의견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반혁명 분자에다 명칭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

전쟁이 시작되어 날짜가 흘렀는데 1차 진공 한다면서 많은 인민군 부대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가면서 밥을 해달라고 하여 마을 인민들은 상부의 지시에 의해서 무조건 밥을 해주게 되었다. 밥을 안 해주는 집은 반동이라고 하였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일시적 후퇴를 하는 시기였다. 다시 돌아오는 그 많은 군인들을 또 밥을 해먹이게 되었다. 한집에 쌀도 한도가 있는 것이지 그렇게 많겠나요? 그때 밥을 해내라 하여 쌀이 떨어졌다고 하면 반동이라고 고함을 치며 총부리를 둘러대고 온 집안을 수색하여 쌀이 없으면 총으로 닭과 돼지를 쏘아 잡아가곤 하였다.

 

이때로부터 인민들은 인민군대를 무서운 사람들로 인정하게 되었다.

................................................................


그 후에 몇일이 지났는데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허덕이고 있을 때 2일 후에는 국방군들이 밥을 갔다 준다는 소식들이 왔다. 사람들은 좋아서 기다리다 그날 9시경에 국방군들이 대형 화물차에다 밥을 싣고 왔는데 밥을 철갑모만한 크기로 뭉쳐서 하얀 백지에다 싼 것을 세 대당 세 개씩 나누어 주어서 먹었는데 왜 이렇게 밥이 맛이 있는지 그 전에 집에서 먹던 밥은 대상도 안 되기 때문에 어른들은 말하기를 곡창지대는 남쪽이기 때문에 맛있다고 하면서 통일이 되면 그곳 남쪽에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주민들의 감정은 달라졌다. 인민군대는 총부리를 둘러대고 호통을 치면서 뺏뜨려 먹고 갔는데 인민들이 굶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밥까지 만들어서 공급을 해주니까 정말 고마운 국방군들이라고 하였다. 그때 그 밥은 남한에서 만들어서 기차로 실어다가 100리 떨어진 산간지대까지 공급하여 주었으니 어떻게 많은 밥을 지어 날라 왔는지 정말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전투 실전을 그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고 60평생을 살아왔고 이런 말만 하면 선전을 한 것으로 취급하여 없애 치우기 때문에 그랬다.

 


그 후부터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개인들의 토지를 다 뺏어가지고 공동체로 만들어 집단 로동을 하니까 모두 일을 안 하고 건달만 부려 농사들은 전반적으로 패만하였다.

그러면서 모든 선전들을 남조선에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을 계기로 전국이 다 휴식하는 짬을 리용하여 불

추천 : 0, 조회 : 68
코멘트 2 | 트랙백 0 수정 | 삭제 |
처음


 
  인민학교 3학년, 전쟁의 실상

 

 


  [....집단 로동을 하니까 모두 일을 안 하고 건달만 부려 농사들은 전반적으로 패만하였다.


.... 말 마디나 좀 하고 바른 말을 하여 정당한 의견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반혁명 분자에다 명칭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

전쟁이 시작되어 날짜가 흘렀는데 1차 진공 한다면서 많은 인민군 부대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가면서 밥을 해달라고 하여 마을 인민들은 상부의 지시에 의해서 무조건 밥을 해주게 되었다. 밥을 안 해주는 집은 반동이라고 하였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일시적 후퇴를 하는 시기였다. 다시 돌아오는 그 많은 군인들을 또 밥을 해먹이게 되었다. 한집에 쌀도 한도가 있는 것이지 그렇게 많겠나요? 그때 밥을 해내라 하여 쌀이 떨어졌다고 하면 반동이라고 고함을 치며 총부리를 둘러대고 온 집안을 수색하여 쌀이 없으면 총으로 닭과 돼지를 쏘아 잡아가곤 하였다.

 

이때로부터 인민들은 인민군대를 무서운 사람들로 인정하게 되었다.

................................................................


그 후에 몇일이 지났는데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허덕이고 있을 때 2일 후에는 국방군들이 밥을 갔다 준다는 소식들이 왔다. 사람들은 좋아서 기다리다 그날 9시경에 국방군들이 대형 화물차에다 밥을 싣고 왔는데 밥을 철갑모만한 크기로 뭉쳐서 하얀 백지에다 싼 것을 세 대당 세 개씩 나누어 주어서 먹었는데 왜 이렇게 밥이 맛이 있는지 그 전에 집에서 먹던 밥은 대상도 안 되기 때문에 어른들은 말하기를 곡창지대는 남쪽이기 때문에 맛있다고 하면서 통일이 되면 그곳 남쪽에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주민들의 감정은 달라졌다. 인민군대는 총부리를 둘러대고 호통을 치면서 뺏뜨려 먹고 갔는데 인민들이 굶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밥까지 만들어서 공급을 해주니까 정말 고마운 국방군들이라고 하였다. 그때 그 밥은 남한에서 만들어서 기차로 실어다가 100리 떨어진 산간지대까지 공급하여 주었으니 어떻게 많은 밥을 지어 날라 왔는지 정말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전투 실전을 그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고 60평생을 살아왔고 이런 말만 하면 선전을 한 것으로 취급하여 없애 치우기 때문에 그랬다.

 


그 후부터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개인들의 토지를 다 뺏어가지고 공동체로 만들어 집단 로동을 하니까 모두 일을 안 하고 건달만 부려 농사들은 전반적으로 패만하였다.

그러면서 모든 선전들을 남조선에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을 계기로 전국이 다 휴식하는 짬을 리용하여 불의의 전쟁을 일으켜 수다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교육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북한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말 마디나 좀 하고 바른 말을 하여 정당한 의견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반혁명 분자에다 명칭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수십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머리 제일 나쁘고 못살았다는 사람을 간부로 등용시켜 일을 시킴으로 하여 반항이 없고 하라는 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 다음부터는 가족주의가 커지면서 지방주의가 되고 지방주의가 커지면 반란이 일어난다고 모든 가족이나 친척, 친구, 직장생활에서 형님, 동생, 오빠, 아저씨라는 말을 못하게 만들어 모든 사람들 호상간에는 동무라고 부르라 명령을 내렸고 김일성만 동지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아저씨 형님 소리만 들으면 집단 회의를 열고 집단 공격도문 비판을 해도 안 들으면 무서운 징벌과 6개월 무보수 로동까지 시키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수단이였다. 금방 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오면 20대들이 40대, 50대들을 동무라고 불러 나이차이 없이 같은 동기 동창으로 만들어 놓았고 심지여는 며누리가 시아버지를 보고 시아버지동무 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곳곳마다 이런 현상들이 벌어져서 많은 사람들을 웃기군 하였지요. 그 후 10년 이상 되여서 부터는 자기 나이와 아래 나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동무라고 부르고 자기 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동지라 부르게 하여 19세 난 아이들도 60세 어른에게도 또한 자기 아버지와 같은 분들에게도 꼭꼭 동지라고 불렀지요. 김일성도 동지라 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말을 못했지요.

 그리고 악수도 서양식이라 하여 악수를 못하게 했고 조건은 손에는 무서운 균들이 득실득실하기 때문에 그 병균들이 있다 하여 병의 근원이 된다고까지 만들었습니다.
 
............................................................

 

 

 

 

----------------------------------------------------------------

 

 

[....중공군 포로... 3분의 2가 중공으로의 송환을 거부, 자유중국(대만)으로 갔습니다.......]

 

 

...............................................................

2년동안 정전회담중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만 중요한것은 포로교환 문제였습니다. 자료를 보면 미군포로가 5,178명, 전사자가 33,629명, 부상자가 103,284명입니다.

한국군 포로는 8,321명 밖에 안되요. 우리가 수용했던 인민군포로가 75,823명인데 한국군포로가 8,321명밖에 안된다는건 말이 안돼요. 우리는 정직하게 포로를 다 보냈는데, 저들은 8천3백여명만 보내고 나머지(6만여 명으로 추정)는 아오지탄광으로 보내어 불법으로 강제노동을 시킨겁니다.


중국측 자료를 보면 모택동이 중공군포로 21,371명중 공산중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포로가 1만5천여명 즉 3분의 2가 중공으로의 송환을 거부, 자유중국(대만)으로 갔습니다. 돌아간 3분의 1은 적에게 투항했다 하여 叛徒반도라며 갖은 학대를 받고 살았답니다.

포로 3분의 2가 돌아오지 않은데 화가난 모택동이 엉뚱하게도 김일성에게 한국군포로들을 송환하지 말라고 분풀이를 한것입니다.

.........................................................

 


     *

...........................................................


<모택동이 한국군 포로 보내지 말라, 김일성에 지시>


“...중국인 전쟁포로 2만1천3백74명 가운데 3분의 2는 공산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거절, 그 대다수가 대만으로 갔다. 본토로 간 3분의 1은 (적에게) 투항했다는 이유로 叛逆者(반역자)의 딱지가 붙어 모택동정권이 끝날 때까지 모진 취급을 당했다.


또 한 가지, 모택동은 한민족의 불행에 잔혹한 공헌을 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모택동은 휴전당시 북한에 불법 억류된 6만 명 이상의 한국군 포로들을 최악의 운명으로 몰아넣는 결정에 손을 빌은 것이다. 한국군 포로를 보내지 말도록 김일성에게 지시한 것이다.(이때 김일성은 인민군의 지휘권을 중공군사령관 彭德懷(팽덕회)에게 이양하고 있었다)


한국군 포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에서도 가장 후진 벽촌으로 분산수용했다. 생존자가 있다면 지금도 이런곳에 그대로 수용돼 있을 것이다.”

........................................................

 

 

 

----------------------------------------------------------------

 


1953년 동독 폭동 사태

 


 배경 

동독 정부가 건축 노동자의 노르마(공산국가에서 노동자에게 부과하는 작업 기준량)를 인상하자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파업이 반정부 운동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경과 

 폭동 사태가 일어나기 6일 전인 6월 11일 동독 정부는 독일 통일의 길을 트기 위하여 종래의 강압적인 사회주의화 정책을 완화하는 새로운 조치를 발표하였으나, 근본적으로 소련군의 점령과 공산당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동베를린 시민들은 6월 17일 봉기하여 공산당 본부와 기타 기관을 습격하였다.

이 의거는 동베를린뿐만 아니라 동독 전역로 파급되었으나 소련군 전차부대의 출동으로 진압되었다.

 

 

 


------------------------------------------------------------------

 

 


.......................................................


이와 때를 맞춰 북한의 김일성은 그해 9월8일 건국10주년 기념대회에서 귀환동포를 적극적으로 환영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당시 북한은 전후복구사업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특히 일본에서 기술을 익힌 노동자의 귀환을 기대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인도주의를 내세워 조국에 귀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선전공세를 폈다.


북한의 당시 속셈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발전상을 일본에 선전하고 국제사회에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으려던 것이었다. 재일 한인들에 대해서는 북한은 세금을 내지않는 지상낙원이라고 꾀었다. 북한에 귀환하는 사람에게는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것은 물론 직장을 제공하고 아동들은 즉시 취학시키며 정착금으로 성인은 1인당 2만원,14세 이하의 아동에게는 1만원씩을 지급한다고 했다. 당시 북한이 선전과 일본인 협력자 매수 등에 들인 비용은 2조원에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북한의 계략에 속아 북한에 송환된 북송자 숫자는 59년부터 82년사이 9만3천3백44명에 이른다. 북송사업은 한때 성공한듯 보였다. 59년 2천9백42명을 시발로,60년 4만9천36명,61년 2만2천8백1명으로 피크에 올랐었으나 이후 숫자가 격감했다. 68년부터 70년 사이에는 일시 중단된 적도 있었으며 그 이후는 몇백명ㆍ몇십명 단위였다. 니가타(신석)항에서 눈물을 뿌리고 떠난 북송자들은 그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에 남은 가족들에게 『헌것이라도 좋으니 의복이나 재봉틀,또는 라면을…』이라며 궁핍한 생활상을 편지속에 전해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북한이 이들 북송자들을 인질로 잡고 조총련계 사업가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거둬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

 

 

 [...청진항에 내리면서 북송교포들은 남루한 옷차림의 북한주민들과 경직된 분위기에 직감적으로 ‘속았다’는 것을 느끼게 됐고 먼저 온 교포들의 비아냥대는 소리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


조국은 우리에게 희망이 아니라 악몽이었다

 

1963년 당시 우리 가족이 만경봉호에 오를 때의 모습과 청진항에 내릴 때 모습을 찍은 사진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조국에 간다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할아버님의 얼굴이 청진항에 도착하면서 험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송을 반대했던 자식들로부터 원망을 들었지만 아무런 말씀을 할 수 없었다. 자식도 자식이었지만 빠찡꼬에서 근무했던 많은 조선사람들을 설득해 북한으로 데려왔는데, 북한 당국은 그들을 모두 지방의 탄광, 광산, 농촌 등으로 보내버렸으니 “다시 일본으로 보내달라”는 그들의 항의 때문에 우리 조부모님들은 할말을 잃으셨다.


청진항에 내리면서 북송교포들은 남루한 옷차림의 북한주민들과 경직된 분위기에 직감적으로 ‘속았다’는 것을 느끼게 됐고 먼저 온 교포들의 비아냥대는 소리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러한 소식이 점차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북송교포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1967년 11월까지 155차에 걸쳐 8만 8611명의 교포들을 북송함으로써 대규모의 북송작업은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총련은 상공인들을 상대로 ‘애국지원사업’을 독려하면서 끈질기게 교포들을 설득하여, 모든 공장설비를 가지고 북한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7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북한으로 북송한 재일교포는 총 9만 3000명에 이르렀다.


재일 교포들을 대거 북한으로 받아들인 김일성은 남한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정통성과 인도주의적인 이미지를 확고히 구축함으로써 큰 성과를 보게 됐다. 또한 이들과 함께 흘러 들어온 막대한 자본과 기술은 당시 북한경제에 큰 보탬이 됐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김일성 독재체제가 강화되고 김정일이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발표하면서 재일 교포들은 더 이상 북한정권에게 환영할만한 대상이 되지 못했다.


우선 북한주민들에게 일본에 대한 환상이 전파되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 싹이 자라는 것을 가장 경계했고, 일부 재일 교포들이 폭력조직을 결성되면서 사회기강이 흐트러지자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됐다. 특히 1960년대 중순경 함경남도에 위치한 검덕광산을 찾은 김일성 앞에 느닷없이 한 일본인 처(妻)가 나타나 “제발 일본에 다시 보내달라”고 요청한 사건은 김일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어 평양에서 벌어진 일본인 처들의 고향방문을 요구하는 북한 최초의 데모는 북한정권을 놀라게 했고 이때부터 재일 북송교포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검열이 시작됐다.

 

1970년대 초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던 버릇 때문에 함부로 말하는 재일교포들과 생활이 사회주의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숙청대상이 됐지만, 70년대 후반 들어서는 조총련 의장 한덕수의 반대파들이 대거 숙청돼 수용소로 끌려갔다.

유명한 오페라가수 김영길을 비롯해 조총련 부의장 김병식, 조총련 교육부장 한학수, 교토본부위원장 윤덕우 등 거물급 총련계 북송교포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국가안전보위부에 의해 행방불명됐고 가족들은 함경남도 요덕군 정치범 수용소로 압송됐다.


평양에 주로 거주했던 조총련계 간부출신들은 1970년대 들어 하나 둘 행방불명되었다. 총련 간부 출신들에 대한 숙청은,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도 이해할 수 없는 ‘반혁명분자’, ‘간첩’의 오명을 씌웠고, 죄를 지었다는 당사자 대부분은 수용소에서 처형됐거나 영양실조로 죽었다.

요덕군에 위치한 15호 관리소(정치범 수용소)만 해도 약 5,000명 가량의 북송교포가 끌려와 있었는데 이 가운데 1/3정도는 조총련 고위간부 출신 가족들 이였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조차 알지 못했고, 북조선에 속아서 온 것만 해도 억울한데 수용소에까지 들어왔으니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국은 우리를 동포가 아니라 돈줄로 보았다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던 조총련 간부 출신의 가족들은 1985년 김정일의 특별지시에 의해 대거 석방됐다. 독재자의 선의(善意)가 아니라 당시 일본과의 수교문제가 있었고, 방문단으로 북한에 왔던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만나지 못한 것을 항의하자 조총련이 김정일에게 보고서를 전달해 결단을 내렸다는 소문이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죽은 줄만 알았던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던 많은 북송교포들은 대거 석방됐지만 죄를 지었다는 당사자들 대부분(이들은 평양시 승호리 교화소에 수감됨)은 단 한 명도 살아 나오지 못했다.

.................................................

1980년대 이후 재일 교포들의 북한방문이 시작되자 북송 교포들의 지위가 향상되기 시작했다. 애국사업이니, 충성사업이니 하면서 조총련계 상공인들이 북송된 가족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공장과 기술, 자본을 투자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재일교포들과 합작, 합영회사를 만드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평양의 대부분 현대식 공장들은 재일교포들의 투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친척들에 의해 공장이 세워졌지만 북한의 가족은 그 공장의 책임자가 아니라 항상 부(副)사장, 부직장장 등 두 번째 자리밖에 주지 않았다. 수익금은 제멋대로 국가가 통제하고 간부들의 횡포로 뇌물이 관행처럼 돼, 북의 가족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퍼주면서 유지되는 일부 공장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

전 인류가 북송 재일교포 문제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사람은 인생의 어느 한순간에 중대한 결정을 해야할 때가 있다. 한번의 결정 때문에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면 엄청난 고민과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검증도 안된 미지의 땅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는 것은 사실 상상할 수 없는 모험이다. 하지만 북한으로 건너간 10만 재일 교포들은 그들의 북송을 모험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지상낙원이요 자신들의 꿈을 실현할 조국으로 생각했다. 철저하게 조작된 ‘사기극’에 10만 명의 운명은 한번의 잘못된 결정으로 처참하게 망가지게 된 것이다.

.............................................

조총련은 자신들이 보낸 10만 명의 북송교포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치범으로 투옥돼 행방불명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외면했고 김정일 정권의 수족이 돼 북한인민들을 기만하고 있다. 일본에 남은 가족들도 북한의 가족들 때문에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김정일의 ‘인질정책’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곳이 바로 재일교포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일본인 납치자 문제가 일본열도를 들끓게 하고 있지만 그것은 김정일이 재일교포를 상대로 저지른 학살과 만행, 금품갈취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작은 문제다. 피납자와 가족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

 

 

 


--------------------------------------------------------------

 

    *


............................................................


- 1956년까지 동독 주민 약 172만 명이 동독 고향을 등지고 떠남. 그 후 동독은 서방 이주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 새 여권법을 制定. 共和國 脫出(Republikflucht)은 범죄행위로 간주됨


- 1960년에 이르기까지 - 특히 농업생산협동조합(LPG) 강제 가입을 면하기 위해 서방으로 탈출하는 농민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 서방으로 移住하게 된 동독 주민들의 수가 계속 증가함


o 西베를린 주민등록 담당 관서에 신고를 한 소련점령지구에서 탈출한 난민의 수는 1960년 9월 한 달 동안에만 20, 968명에 달함

 

-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1961년까지 약 300만의 동독 주민이 동독을 떠나 서방으로 이주함. 서방으로 이주한 동독 주민들 가운데 양호하게 교육 훈련 받은 자들이 많아 이러한 두뇌 유출와 양질의 노동력 유출 현상은 동독 경제력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독일민주공화국의 존립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함.


그리하여 1961년 8월 13일 동독 공산당 정권은 人口流出로 인한 國家의 人的 經濟的 出血을 國境 閉鎖를 통해서만 억제할 있다고 생각, 베를린 障壁의 構築에 들어감.

................................................................

 

 

 

---------------------------------------------------------------

 

 

 1960  [...동조자는 30%뿐이고 70%가 반감을 품고 있으며.....]

 

 

.............................................................


60년에 끝난 중앙당 집중지도 (반혁명분자 색출을 위한 불량출신성분자파악) 보고서가 비밀리에 반탐정원에게만 알려졌는데 북한주민중 진정한 노동당, 김일성 동조자는 30%뿐이고 70%가 반감을 품고 있으며 이중 40%가 기회분자로 나타났다.


당황한 노동당은 출신성분불량자를 포섭하는 정책개조사업을 벌였다.

그내용을 보면 월남자로 처리된 행방불명자를 미군폭격등에 죽은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고 증인까지 날조해 유족에게 통보,당지지세력으로 포섭하는등의 방법을 썼다.

............................................................

 

 

 

--------------------------------------------------------------

 

 

 [... 공포와 강제만이 꽉 차 있었습니다.....]

 


  1961년 9월 평양 

 

 

.........................................................

1961년 9월5일, 林錫珍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북한 사회가 잘못돼 있는 곳이란 걸 직감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생각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지요』


서독에서 우편물로 받아 본 화려한 화보 속의 밝고 명랑한 북한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중충하고 잿빛 감도는 건물들, 색깔이라곤 새빨간 광목에 쓰여진 金日成에 대한 충성 구호들뿐, 보이는 사람들은 창백하고 공포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20세기 초 유럽의 유명 作家인 아서 케슬러나 앙드레 지드가 사회주의를 주창하다 1930년대에 모스크바에 한 번 가 보고는 그 환상에서 깨어났지요. 그로부터 30년 뒤에 제가 꼭 그렇게 느낀 겁니다. 당시 朴대통령에게 「1970년대에 접어들면 북한은 분명히 위기국면으로 들어설 겁니다. 남한이 북한을 추월하게 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朴正熙는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라고 물었다.

『그 사회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선 인민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공포와 강제만이 꽉 차 있었습니다. 이조시대 탐관오리보다 더한 사람들이 당간부였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고 한다. 마치 자신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林錫珍은 평양 모란봉 초대소에 도착해 勅使(칙사) 대접을 받으며 3주 동안 북한의 여러 곳을 돌아 다닐 수 있었다. 벤츠 승용차에 감시하는 안내원과 동승하여 정해진 시간표대로 방문하기는 했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빈틈을 林錫珍은 놓치지 않고 발견하곤 분석했다.


『청진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초라한 驛舍였는데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기약없이 플랫폼에서 서 있어야 했어요. 감시하던 안내인도 화장실을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 주민들이 기차를 타러 나왔다가 제 곁에서 이야기하는 걸 엿듣게 됐지요. 한 사람이 「우리 고향엔 먹을 게 없어 아이들이 아우성이오」라고 하니 옆 사람이 「그럼 밀가루 과자나 주지」라고 했어요. 그러자 한 숨을 푹 쉬던 주민은 「그것도 있어야 주지요」 하는 겁니다.


기차 안에서도 주민들은 제가 입고 있던 독일제 양복과 구두를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습니다. 안내인이 허용하는 북한 사회만 보던 나에게 이런 쥐구멍 같은 틈을 통해 흘러 나오는 북한의 내면은 충격 이상이었습니다』

................................................................

 

 

 

-----------------------------------------------------------------

 

 

..................................................

"1962년 등소평은 ... '흰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

등소평은 78년 중국의 운명을 주도한 후에 다시 '백묘흑묘론'으로써 중국의 경제건설을 지휘하였다. 은퇴한 후에도 등소평은 유명한 화가에게 <쌍묘도(雙猫圖)>를 그려 달라고 부탁하여 그것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

 

 


-------------------------------------------------------------

 

 


......................................................


1960년대 신혼생활을 하던 나는 안해(아내)가 밤일을 하면 아침밥을 내가 하였는데 정량대로 밥을 한 다음 안해의 두끼 분 밥을 푸고 나의 점심밥 변또(도시락)를 싸고 나면 나의 아침 밥이 반 그릇도 못되었다.

그것을 다 먹고 난 다음 냠냠해서 변또밥까지 다 먹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날에는 빈 변또를 들고 출근할 수도 없고 또 집에 가자니 안해가 알 것 같아서 그 빈 변또 보자기를 집밖에 감춰놓고 출근하였다. 그런 날은 물론 점심을 굶었다.

 

700이라는 배급 기준량을 타먹는 사람이 이러할진대 그 절반의 기준량을 받는 노인들이나 가정부인들의 고통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다.

그러한 적은 모자라는 배급량도 70년대에 와서는 절약한다고 보름에 2일분을 잘랐고, 80년대에는 다시 기준량을 더 줄여 700이 600도 못되게 만들었다. 90년대에는 배급날짜가 되어도 배급을 안 주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북한식 사회주의는 배고픈 사회주의로부터 아사식 사회주의로 구걸식 사회주의로 전변되었다. 이것도 성과라면 당연히 김일성의 주체농법의 성과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한 배급제도하에서 자기가 먹고싶은 것을 먹을 선택권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북한인들은 게걸증이 들어 항상 먹었으면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모든 북한인민들은 항상 식전이다. 마치 먹을 것을 찾아 북한의 골목들을 누비고 있는 갈비뼈가 앙상한 북한의 개들과 같이 식욕의 포로일 뿐

....................................................

 

 

 

--------------------------------------------------------------

 

 

..............................................................
 

이진선의 1967년 8월 29일 일기를 살펴보자.

 

"16차 전원에서 김영주 동지가 제안한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 채택된 뒤 전국 곳곳에 김일성 수상 동지의 동상이 건립되고 있다. … 중략 …

유일사상이란 말 자체가 얼마나 사회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는가. 굳이 따지자면 한낱 정책노선에 지나지 않는 것을 일러 사상, 그것도 유일이라는 이름으로 당 전체에 확립하려는 모습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다. 개인 숭배의 극한적 형태가 아닌가. … 중략 …

 혈연으로 후계자를 정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는 오늘을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231페이지)

 

이어서 한달 후 그는 "공화국 도시와 농촌 곳곳에서 지난 10여년 동안 인민들을 위해 출판되어온 모든 서양 문학들을 반복고주의와 반수정주의라는 구호아래 단속해가는 공화국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라고 쓰여 있다.


성혜랑의 수기 <등나무집>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수기에서 성혜랑은 "전쟁때 나는 미국 비행기가 손바닥만한 도시에 하루에 수백 개의 폭탄을 던진 때도 이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껴본 일이 없었다"라고 쓰고 있다

......................................................................

 

 


-------------------------------------------------------------

 


1970년대 초 이래 생활 형편이 계속해서 급전직하로 나빠지기만 했다

 


-------------------------------------------------------------

 

.........................................................

그때 벌써 농촌은 물자 고갈로 입을 것, 신을 것이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는 1970년대 중반, 성혜랑은 조카 김정남의 교육을 위해 ‘가정교사’로 김정일 관저 생활을 시작한다.
..........................................................

 


--------------------------------------------------------------

 

북조선의 경제가 침체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부터이고 인민생활이 눈에 뜨이게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 말부터입니다.

 


---------------------------------------------------------------

 


...........................................................


『북한에 식량난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말부터로, 그 때부터 단 한 번도 국가가 배급량의 100%를 공급한 적이 없습니다.

국가가 주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니 국경 지역 사람들은 「중국에서는 개도 쌀밥을 먹고 돼지도 옥수수를 먹는데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개돼지만도 못하다. 이렇게 기다리다 굶어 죽느니 차라리 뛰쳐나가자」 해서 脫北 행렬이 시작된 겁니다』

 
  尹씨는 북한 식량난은 홍수나 천재지변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1970년대부터 20여 년 북한 경제가 하향곡선을 그린 것이 곪아서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74년 말 金正日은 그 해 인민경제 계획 수행이 어렵게 되자 「수령님의 전사가 할 일은 수령님께서 제일 걱정하는 경제문제를 풀어드리는 것」이라면서 「70일 전투」를 조직하여 밀어붙였습니다.

자재나 원료, 자원 등 아무 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가용자원을 총동원하여 「70일 전투」를 벌인 결과 그 해 계획은 겨우 달성했지만, 다음해부터 그 여파가 심각하게 제기됐습니다. 국력이 쇠진한 상태에서 일시에 자원과 자재, 원료를 대량 투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를 혹사시킨 것이죠.

 「70일 전투」의 여파로 1975년부터 경제가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해 골병이 든 겁니다』

.........................................................

 

 

 

---------------------------------------------------------------

 

 

..........................................................


    나는 1971년에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린 시절은 나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막내 외아들이라 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굄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위로 누이가 셋 있었지만 부모님은 표나게 나를 싸고도셨고, 아버지의 사랑은 더욱 유별나셨다. 그러나 행복한 내 어린 날마저도 배고픔의 기억 속에 젖어 있다.

 

매일 주식으로 먹는 것은 감자였다. 밥상에 앉으면 속에서 물냄새부터 올라왔다. 감자에 물릴 대로 물린 뱃속은 늘 뭔가 다른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또래들과 과수원에 사과를 몰래 따러갔다. 그러나 과수원 할아버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를 잡고 말았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실토했다. 나의 첫마디가 “감자가 너무 먹기 싫어요”였다. 그 말은 얼마나 오랫동안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먹을 것은 과수원의 사과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과를 먹으려고 왔다고 했다.

사실은 훔치러 간 것이었지만 철없는 나이였기에 훔친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달콤한 사과를 씹어 목구멍으로 삼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과수원 할아버지는 한동안 우리를 말없이 지켜보셨다. 아마 우리가 애처로웠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잠시 후에 나타났다. 한 명에게 5개씩 사과를 쥐어주었다. 우리는 팔을 쭉 펴들고 사과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실컷 먹고 또 과수원에서 놀다가라고 했다. 우리는 사과의 단물을 빨아먹었다. 마냥 신이 났다. 해지는 줄도 모르고 과수원을 누비며 뛰어 놀았다.


해질 무렵, 할아버지는 그물주머니에 사과를 채워주었다. 우리는 사과가 든 주머니를 들고 뜀뛰기를 하며 마을로 들어섰다. 어둑한 저쪽에 누가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의 엄한 눈길을 보자 그만 굳어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듣고서도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도둑질을 했다고 생각했다. 8살이라 매를 8대 맞았다. 종아리에 굵은 뱀이 서고 검붉은 피가 나왔다. 밤에 잠을 자다 깼다. 눈물투성이로 흐느끼다 잠들었는데 다시 깬 것이었다.

 

잠결에도 매를 맞은 다리가 쓰려 왔다. 살며시 눈을 뜨니 어머니가 솜에 빨간약을 묻혀가지고 바르고 계셨다. 옆에서는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듯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계속 잠든 척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어린 것이 얼마나 감자 먹기가 싫었으면 과수원에 갔겠어요. 허지만 바늘 도적이 소도적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마음을 먹고 오늘은 매를 때렸어요”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목이 메어 도저히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일어나 꿇어앉았다. “어머니, 다시는 과수원에 가지 않을래요”라고 말하면서 엉엉 울고 말았다.

..........................................................

 

 

 


------------------------------------------------------------------

 

..............................................................


우리가 월남자 가족-남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양에서 회령으로 쫓

겨간 것은 76년 9월쯤이었다. 평양과 회령의 생활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

가 났다. 평양에선 식량배급의 80∼90%가 입쌀이었고 라면도 먹을 수 있

었다. 그러나 회령에서의 첫배급은 강냉이를 이삭채로 주었다.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

 

 

 

--------------------------------------------------------------

 

......................................................

당시 1978년도까지만 하여도 북한 주민들의 집에는 텔레비같은 가전기구가 거의 없었다. 한다하는 간부들의 집에도 없는 것을 재일 동포들은 가지고 있었다.

...................................................

 

 

-------------------------------------------------------------

 

 

경향신문 1980.7.12.

 

귀순한 북한주민 이영우씨 회견

당추방경고에 자유선택

............................

 

..............................................

귀순 직전까지 개성시 판문군 일용품수매사업소에서 당세포비서 겸 공급지도원으로 일해 왔다는 이씨는....

....................................................

귀순한후에는 북의 선전이 모두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군초소에 도착해서부터 지금까지 모든게 북에서 듣던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주민들의 최근 생활 실태 = 내가 남한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것은 북한 인민들이 인간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식량 사정을 보면 1일 배급량이 노무자와 사무원에 대해 7백g씩인데 그나마 전쟁비축미라는 구실로 1백g씩을 떼고 6백g씩을 주고 있으며 노동력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3백g밖에 주지 않는다.


그나마도 강냉이등 잡곡7에 쌀3의 비율로 주고 있어 강냉이를 삶아 먹고 사는데 그것도 비축미를 떼기 때문에 하루 한두끼는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간장 된장이 모자라 소금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어 먹으며 육류는 돼지고기를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과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 그리고 1월 1일에 한해 가구당 5백g씩 배급하고 있어 평소에는 고기 구경도 할 수없는 실정이다.

.........................................

최근 북괴의 전쟁준비실태 = 내가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느낀것은 남북한이 상호내왕을 한다면 북한은 당장 패하고 말것이라고 느꼈다.


김일성은 전쟁으로 조국통일한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실례로 모든 주요공장이나 기업소는 이미 오래전에 갱속으로 들어 갔고 인민으로부터 하루 1백g씩 빼앗은 식량을 각군별로 식량창고를 만들어 비축하고 잇다

.........................................

주민들의 대남인식 및 전쟁관 = 김일성의 선전대로 남조선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7백만명의 실업자가 득실거리는 것으로 믿고 있다.

모든 기술이 뒤떨어져 자체 생산품은 하나도 없고 모두 미국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

귀순소감 및 하고 싶은 말 = 남한이 이렇게 발전되고 행복한 세상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여기가 바로 지상의 낙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북한보다는 반세기는 앞서 있다고 말하고 싶다.

.........................................................

 

 


----------------------------------------------------------------

 

.........................................................

 1980년대 초부터는 조선에서 새로 만든 제품의 품질이 1970년대 초에 만든 것보다 더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

 

.........................................................


1980년대 초부터 북조선에서 경제가 침체하고 인민들의 생활이 눈에 뜨이게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인민들 속에서는 수령님은 인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중간층의 간부들이 일을 잘 못해서 그런다는 소문이 크게 나돌았습니다.

그때부터 경제와 인민생활이 떨어지는 것은 중간층의 간부들이 잘못 때문이라는 이른바 중간층 간부 책임론이 떠돌았습니다.

............................................................

 

 


-----------------------------------------------------------------

 

.................................................................


저는 80년대 초부터 사회주의 공산권을 직접 접하면서 이 체제의 붕괴는 역사적인 필연임을 감지하였습니다. 인민들의 형편없는 의식주 사정, 획일적인 통제로 창의성이 완전 결여된 분위기 등이 국가 전체가 느슨한 집단 수용소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97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공산권 경제분야를 공부하고 싶다고 하자, 담당교수는 한참 쳐다 보더니 저에게 “향후 10년 안에 유럽의 공산권은 붕괴된다. 쓸모없는 학문이니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응답해 주었습니다.

........................................................

 

 


--------------------------------------------------------------

 

....................................................

그러한 적은 모자라는 배급량도 70년대에 와서는 절약한다고 보름에 2일분을 잘랐고, 80년대에는 다시 기준량을 더 줄여 700이 600도 못되게 만들었다. 90년대에는 배급날짜가 되어도 배급을 안 주기 시작하였다.

..........................................................

 

 

--------------------------------------------------------------

 


 1982.  김일성


.............................................................


우리는 사회주의경제건설의 10대전망목표를 점령하기 위하여 먼저 식량문제를 보다 원만히 해결하는데 큰 힘을 넣고 있습니다.


우리는 쌀은 곧 사회주의이며 공산주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

 

 

이웅평 대위 진술 민족에 남침위기 알리러 왔다


경향신문 1983.2.28.

 

..............................................................

이대위는 자기가 북한에서 조종사로 근무하면서 81년 리비아 수단 이집트등 중동지역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동료들로부터 외국비행사들은 승용차 TV 냉장고 등을 소유하고 잘사는데 북한비행사들은 난로용 화목을 직접 채취하고 78년부터는 간식 기호품공급이 점점 적어 지더니 나중에는 담배 술까지 제한받는 등 먹는 것까지 걱정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이같은 북한실정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

 


  *


.......................................................

이대위는 본사와 특별대담을 하는 자리에서 "활기찬 서울을 보고 깜작 놀랐다"고 밝혔다. 활기찬 서울이 바로 자유의 모습이요 자유의 댓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대위는 빽이 있어야 북한에서는 출세도 한다고 털어 놓았고 도둑이 많아 북한 주민들은 빨래를 마음대로 널어 놓지도 못하며 북한의 경찰격인 안전원도 컬러TV를 사고 싶어서 은행을 턴 일도 있다고 말했다.
.........................................................

 


   *

..........................................................


이씨는 15일밤 MBC TV서 방영한 특집방송에서 이곳 생활의 소감을 밝히고  특히 백화점에 쌓여 있는 전자제품을 보고 "이것들이 모두 국산제품이 틀림없느냐"고 놀라면서 "국산품이면 조선말(한글)로 크게 딱지를 붙여서 알아 볼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공군사관학교에 들러 역대 공사교장들의 사진을 진열해둔것을 보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부자외의 다른 사람 사진진열은 상상할수도 없다"고 말했다.

............................................

이씨는 MBC TV 기자와 함께 서울 밤거리를 돌아 보고 대포집에서 시민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일과가 끝난 후 휴식을 취하는 서울사람들의 생활을 보니까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북한서는 3간짜리 집에도 전기를 다 켜지 못하게 하는 판인데 이곳에 와 보니 낭비가 너무 많다"고 말하고 되도록 절약해서 국력을 기르는 데 이용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동아일보 1983.5.18.


리웅평  북한 탈출 수기

< 25 >  모의전투비행

 

...........................................................

18세나 됐을까 싶은 전사가 찬바람이 쌩쌩 부는 활주로 끝 내 비행기 밑에서 일하다가 나에게 기체를 인도할 때였다.
................................

"동무는 동장갑 한개 없나"

 나는 겨우 이말 밖에는 못했다.그는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 보더니 힘없이 대꾸했다.

"줄게 뭐야요. 목테(머플러)조차 없고 솜신이 헤어져도 그것조차 갈아주지 않는 걸요 -- "

그러고 보니 그는 목에 때가 더럽게 낀 수건을 두르고 있었고 신발은 앞이 터져 발싸개가 삐주룩이 나와 있었다. 발은 동상에 걸린게 틀림 없을 것이다.

..........................................................

 

 

 


-----------------------------------------------------------------

 

 

  1984.8.4.  金正日―申相玉·崔銀姬 대화

 


............................................................


 우리가. 이게 사회주의 한 30년 해보니까 역시 인민들 먹이고 살리고 하는 것은 서방세계로 뻗쳐 나가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다. 엄연히 서방세계보다 떨어져 있는데 지금. 그래 사람들이 지금 이거 의식문제가, 이거 아주 사상 문제가 아주 중요한데 이거 우리 지금 극복하기 위해서 동구라파 나라들이 지금 저 애먹죠.


이번에 호요방이 만나고 와서 그래요. 우리나라 나왔을 때 당신네 왜 개방, 저 관광업 안하냐, 관광업 하면 돈 많이 번다.

이래서 내 이해해서 우리 관광업 이제 하겠다, .....

............................................................

 

 

   *

..............................................................


「지금은 남북대결이다. 인민들의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가 남조선한테 진다. 이게 사람들이라는 게 배(腹)는 타협할 수 없는 게 아닌가. 배에 들어오는 뭐가 있어야 먹고 봐야 잘 일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거지 먹지 못하는 사람이 일할 생각이 나겠는가」

..............................................................

 

 

 


-----------------------------------------------------------------

 


 1985  [...‘식의주’라고 고쳐 쓰도록 하였다”고.....]

 

 

..............................................................

북한에서는 의식주(衣食住)라 하지 않고 식의주(食衣住)라 부른다. 관용어로 굳어진 의식주를 굳이 식의주로 바꾼 것은 먹는 문제(食)가 입는 문제(衣)보다 앞선다는 이유에서다.


북한이 의식주를 식의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은 84년경으로 전해진다. 당시 김일성은 먹는 문제가 입는 문제에 우선함을 지적하면서 "의식주는 마땅히 식의주로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모든 출판물과 공용 문건에서 의식주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대신 식의주가 쓰이기 시작했다.


김일성의 연설 담화 보고 서한 등 각종 문헌을 모은 "김일성저작집" 제39권(1993)에는 그가 의식주를 식의주로 고쳐 쓰게 한 이유를 설명한 대목이 나온다.


김일성은 85년 10월 정무원(현 내각)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에서 "사람들이 살아나가는데서 먹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옷이나 집 같은 것은 부족하여도 좀 참을 수 있지만 배고픈 것과는 타협할 수 없다. 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먹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의식주라는 말을 식의주라고 고쳐 쓰도록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

 

 

 

----------------------------------------------------------------

 


[...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일제 시대보다 더 못한 세상이라고 한탄한다.
.......]

 


경향신문 1986.1.14.

 

"수재물자 보내고 일주일 강냉이죽 먹었다"

귀순 임종철 하사가 털어 놓은 북의 오늘

 

 

...........................................................


남북한 상호교환방문때 북한기자가 찍은 한강주변 판자집을 보여 주면서 이처럼 거지가 득시글 거린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인민군 하전사들은 "쌍방 접촉으로는 조국통일이 이뤄질 수 없다.대화가 진행되는 기간이라도 수령님이 명령만 하면 전쟁을 일으켜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 주민의 생활참상 = 북한주민은 날이 갈수록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다. 우선 전주민을 대상으로 쌀배급량을 한끼당 무조건 50g씩 공제하기 때문에 식량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한가구에 한달에 무우 10kg, 배추 10kg, 된장, 간장, 소금이외에는 별다른 부식 없이 살아야 한다. 영화나 화보 같은데는 일부러 얼굴이 크고 둥근 사람을 나오게 해서 살찐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다.


보통 노동자가 한달에 받는 월급이 50 - 70원이며 그나마 그나마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다. 아직도 목탄차와 소달구지가 많다. 평양시내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중심가를 제외하고는 목탄차가 외곽으로 다닌다.


50대 이상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일제 시대보다 더 못한 세상이라고 한탄한다.


한국에 수재물자를 보낸 뒤에는 전주민과 군인들이 일주일씩 강냉이죽을 먹었다. 그래도 북한 주민들은 남한동포들을 도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생활한다.

............................................................

 

 

 


-----------------------------------------------------------------

 


[....함경도의 향토음식이라는 함흥냉면과 아바이 순대도 저쪽 북녁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여서......]

 

 

  1987.2.13 


 
[귀순용사 임종철씨가 토로한 북한 실정]


● 앵커: 네, 김만철 씨의 막내아들 광호 군이 어저께 기자들에게 들려준 얘기를 듣고 작년에 중부선선에서 월남했던 귀순용사 임종철 씨가 북한의 실정을 털어 놓았습니다.

 

● 김광호군: 여기서는 거지가 욱실욱실 거리고 부잣집 아이들이 공부하면 거지아이들이 깡통차고 구경한다.

● 임종철(귀순용사): 북한의 모든 학교에 가면 그런 커다란 그림이 제가 학교 다닐 때 그 그림을 많이 봤는데 바로 창문 옆에는 신문팔이, 껌팔이 거지들이 모여서 줄을 서 있는데 부잣집 아이들을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부러워하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

● 김광호군: 놀잇감 한 번도 못 가져봤고 이곳 백화점에서 실컷 만져봤다.

● 임종철(귀순용사): 아바이 놀음이라는 것은 김일성이 어릴 때 만경대 고향집에서 일본 놈들을 족치는 군사놀음을 아바이 놀음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어린이들의 군사놀이를 많이 하고 있고 놀잇감을 볼 수가 없습니다.

 

● 김광호군: 밀에다 물을 타서 끓여서 먹는 것이 밀죽.

● 임종철(귀순용사): 밀죽이라는 것은 밀쌀을 망에다 갈아서 거기다 물을 부어서 죽을 끓여 먹는 것을 말합니다.

저희도 북한에 있을 때 밀죽과 깡냉이죽을 많이 먹었는데 친척이 왔다 가면 쌀이 모자르고. 평상시에도 모자르기 때문에 죽을 많이 끓여 먹습니다.

...................................................

 

 

 

    1987.4.26 


[김만철씨 일가족 새마을 향토 야시장 나들이]

 

● 앵커: 김만철씨 일가족이 오늘 낮 새마을 향토 야시장에 나들이를 했습니다.

● 기자: 산뜻한 봄차림을 한 김만철 씨 일가족은 오늘 오후 새마을 운동 중앙본부에서 벌이고 있는 새마을 향토 야시장을 찾아 따뜻한 남쪽나라 고향의 맛과 정취를 만끽했습니다.

지난 40여년 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의 맛과 멋이 각 고향별로 마련된 향토음식점과 토산품 판매장에서 풍겨나와 아련한 기억을 더듬게 해주었습니다.

 

● 김만철: 야, 이거 나 오늘 너무 먹어서 배 터지겠는데....

● 기자: 특히 이북5도관에서는 두고 온 가족 소식을 김씨로부터 전해 듣고자 하는 안타까움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함경도의 향토음식이라는 함흥냉면과 아바이 순대도 저쪽 북녁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여서 오늘 이렇게 따뜻한 남쪽 나라에 나와서야 처음 맛을 볼 수 있었습니다.


● 기자: 거기서 이런 음식, 요새도 맛볼 수 있습니??

● 김만철씨 부인: 아...우리는 이런 거 없어요. 먹어볼 수도 없어요.

있다는 게 강냉이...

● 김만철: 이북에서는 이 순대를 어쩌다 한 번 씩 먹을 때가 있죠.

근데 뭘 넣는가..

찹쌀같은게 없으니까..좁쌀도 없고, 강냉이쌀을 여기다 넣어요.

우수국산품 상설전시관을 찾아서는 조국의 기술수준이 세계적임을 새삼 깨닫게 됐고 생활필수품 하나하나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

 

 

 

----------------------------------------------------------------

 

 

...........................................................

 나는 통계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으나, 북한경제가 계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당국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에게 허위사실을 보고하고 외부에도 각종 통계를 왜곡시켜 발표해왔다.


 그러나 문서정리실에 남겨진 정확한 통계로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떠오른 무렵인 1975년부터 이미 북한경제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특히 김정일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1986년 이후부터 급격히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

 

 

 

------------------------------------------------------------

 

...........................................................

식량난 혹은 경제위기로서의 '고난의 행군'은 1987년부터 이미 지역적으로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부터 벌써 함경북도, 양강도에서는 미공급(국가 배급 중단)이 시작되었다.
..........................................................

 

 


-------------------------------------------------------------

 

 

 1989  [....임수경씨를 ... 환영했던 평양 대학생들은 1주일간 강제로 살찌우기를 ....]

 


...................................................
 
지난 1989년 북한 평양학생축전에 참석한 ‘통일의 꽃’ 임수경(당시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4년) 씨를 열렬하게 환영했던 평양 대학생들은 1주일간 강제로 살찌우기를 한 상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동아일보가 10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김형직사범대 교수를 지내다 1991년 탈북한 김현식(73) 미국 예일대 초빙교수는 8일 워싱턴에서 열린 ‘연우포럼 국제연대’ 행사에서 강연을 통해 “임 씨를 만났던 김형직대의 내 제자들은 1주일간 ‘강제비육(强制肥育·강제로 살찌우기)’에 처해졌다”고 밝혔다.

‘준수한 인물’을 기준으로 선발된 학생들은 영양 부족 상태를 감추기 위한 고육책으로 당시 평양시내 국제호텔로 보내져 1주일간 고기와 빵 사과 우유를 배가 터질 만큼 먹어야 했다는 것.


학생들은 또 임 씨가 입장할 때는 작은 박수를, 단상에 서면 큰 박수를, 김일성 부자에게 긍정적인 발언을 하면 환호를 곁들인 박수를 치기로 사전에 연습했다고 김 교수는 증언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

 

 

 


-------------------------------------------------------------

 


..........................................................

게다가 1980년대말부터 시작된 뙈기밭바람에 더구나 산림이 없어져갔다. 그때부터 북한에서는 식량난이 시작되여 식량배급이 몇 달씩 밀리고 게다가 배급량도 그 무슨 "애국미"요,"절약미"요 하면서 줄어들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각종 생필품-옷,신발,내의,비누 등이 결정적으로 부족하게 되어 식량과 물물거래형식으로 거래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농촌지역주민들은 너도나도 뙈기밭을 개간하게 되었으며 개울뚝이나 언덕받이 등은 이미 개간되고 그 다음으로 산기슭을 개간하는데 이르게 되었다.

..........................................................

 

 


----------------------------------------------------------------

 

 

  [....식량난 혹은 경제위기로서의 '고난의 행군'은 1987년부터 이미 지역적으로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질문: 북한 경제는 90년대에 왜 파탄 상황을 맞이했나?

 

답: 조선 경제의 파탄 동기로 나는 '13차(제13차세계청년학생축전)'를 들 수 밖에 없다. 식량난 혹은 경제위기로서의 '고난의 행군'은 1987년부터 이미 지역적으로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부터 벌써 함경북도, 양강도에서는 미공급(국가 배급 중단)이 시작되었다. 경제 이상 현상의 현저한 징후는 당시 13차 준비 기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88서울 올림픽에 대항한 '13차'의 평양 유치는 경제적으로는 절대 무리하나 북남 대결상 필요한 정치행사였다.


동서 화해 협력의 추세를 막아 보려는, 일개 소국으로는 너무나 힘겹고 무리한 모험이었다. 하기에 이 행사준비는 사로청(현 김일성주의청년동맹)을 내세워 당중앙이 배후 조종하면서 국가의 계획 경제를 파괴하면서도 강행 추진됐다.


그 결과 함경북도나 양강도에서 무책임한 미공급이 이미 묵인 방치되기 시작했다. 미공급구역을 축소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하자 그 전선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남하를 지속하여 1991년 드디어 평양에 입성하였다.

'미공급'이란 전국 근로자들의 로동에 대한 보수(식량과 임금 등)를 미불(지급하지 못함)하여 국가가 인민에게 진 빚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국가 경제윤리의 타락을 의미한다.

 


미공급 사태는 국가윤리의 타락

 

법의 최고 수준에 있는 경제윤리를 일탈한 국가적 상황은 걷잡을수 없는 관료집단의 전면적 부정 부패를 촉진시켰다. 물리적으로는 전력주파수가 허용치 이하로 떨어져도, 철도운행의 도착 지연 현상이 만성화되어도 고칠수 없는, 현상으로 접수 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공화국 창건 이래 처음으로 갓 입대한 인민군 군인들 속에 영양실조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군(수)품 보장에 대한 군부의 강한 반발이 일면서 이 기회는 군 총참모부로 하여금 직접적 경제활동 참여를 유발시켰다.

 

이처럼 당과 근로단체, 군부 등 특권기관들의 경제 침해 현상이 극도에 달한 결과 계획경제는 무능력하고 약체화된 부실기구로 전락되였다.

계획위원회와 자재공급위원회, 건설위원회, 인민봉사위원회가 다 유명무실 해졌다

2010-07-01 23:32:35 | ipaddress : 220.118.*.41
처음

 

  [....식량난 혹은 경제위기로서의 '고난의 행군'은 1987년부터 이미 지역적으로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질문: 북한 경제는 90년대에 왜 파탄 상황을 맞이했나?

 

답: 조선 경제의 파탄 동기로 나는 '13차(제13차세계청년학생축전)'를 들 수 밖에 없다. 식량난 혹은 경제위기로서의 '고난의 행군'은 1987년부터 이미 지역적으로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부터 벌써 함경북도, 양강도에서는 미공급(국가 배급 중단)이 시작되었다. 경제 이상 현상의 현저한 징후는 당시 13차 준비 기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88서울 올림픽에 대항한 '13차'의 평양 유치는 경제적으로는 절대 무리하나 북남 대결상 필요한 정치행사였다.


동서 화해 협력의 추세를 막아 보려는, 일개 소국으로는 너무나 힘겹고 무리한 모험이었다. 하기에 이 행사준비는 사로청(현 김일성주의청년동맹)을 내세워 당중앙이 배후 조종하면서 국가의 계획 경제를 파괴하면서도 강행 추진됐다.


그 결과 함경북도나 양강도에서 무책임한 미공급이 이미 묵인 방치되기 시작했다. 미공급구역을 축소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하자 그 전선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남하를 지속하여 1991년 드디어 평양에 입성하였다.

'미공급'이란 전국 근로자들의 로동에 대한 보수(식량과 임금 등)를 미불(지급하지 못함)하여 국가가 인민에게 진 빚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국가 경제윤리의 타락을 의미한다.

 


미공급 사태는 국가윤리의 타락

 

법의 최고 수준에 있는 경제윤리를 일탈한 국가적 상황은 걷잡을수 없는 관료집단의 전면적 부정 부패를 촉진시켰다. 물리적으로는 전력주파수가 허용치 이하로 떨어져도, 철도운행의 도착 지연 현상이 만성화되어도 고칠수 없는, 현상으로 접수 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공화국 창건 이래 처음으로 갓 입대한 인민군 군인들 속에 영양실조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군(수)품 보장에 대한 군부의 강한 반발이 일면서 이 기회는 군 총참모부로 하여금 직접적 경제활동 참여를 유발시켰다.

 

이처럼 당과 근로단체, 군부 등 특권기관들의 경제 침해 현상이 극도에 달한 결과 계획경제는 무능력하고 약체화된 부실기구로 전락되였다.

계획위원회와 자재공급위원회, 건설위원회, 인민봉사위원회가 다 유명무실 해졌다. 사회주의국가의 경제주체는 사실상 소멸된 셈이였다. 비개혁적인 경제제도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경제활동을 위법시하는 경제적 질곡으로 전락 되었다

.....................................................

 

 

 

----------------------------------------------------------------

 


...........................................................

신태학(가명, 2003년 입국) 씨는 “실지 주민들이 1년이 가도 고기를 먹어보는 것은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신 씨는 북한 경제상황이 그나마 나았던 90년대 초반 때도 “명절 때나 고기를 먹어봤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1.신태학] “그렇게 못 먹는다. 90년대 이때도 지금보다 좀 낫다고 하는 때인데요, 그때도 돼지고기는 따로 못 먹고요, 혹간 가다가 명절에 세대당 한 킬로(그램)씩 줄 때가 있거든요. 우리집 같은 경우에는 식구 4명이니까 한 킬로 가지고 4명이서 쪼개면 몇 그램씩 되겠어요.”

..........................................................

 

 

 

----------------------------------------------------------------

 


   1992


...............................................................

기자마다 1명씩 배정된 안내원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행동했다.
.........................................

그러나 그들은 자본주의를 원하지 않는다면서도 남한 경제에 대해선 부러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자기들은 미화 50달러면 자식 하나를 결혼시킬 수 있는 돈이라는 말까지 했다.

................................................................

 

 


---------------------------------------------------------------

 

 

    1994. 김일성

 

.................................................................


식량 배급 안 준다는 것은 낭설

 

-이제 북한 내부 문제로 질문의 방향을 돌리고자 합니다. 현재 중국 연변 쪽에 가보면 ‘북의 식량 사정이 말이 아니다’ ‘평양만 제외하고 나머지 주민들은 쌀 한 톨 배급 못 받았다’ 심지어 ‘누구는 굶주려서 자살했다’ 하는 얘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는데 식량난은 실제로 어느 정도입니까.

 

“식량난이라니오. 우리는 기본적으로 먹는 문제는 해결했습니다. 일하는 사람, 은퇴한 사람 등 처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배급은 정확하게 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과거 우리 못사는 조선 사람들의 꿈이 이밥에 고깃국에 기와집에서 비단옷 입고 사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 꿈을 이루려고 계속 노력해왔고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배급이 없다는 것은 낭설입니다. 혹시 의심스러우면 문 선생이 여행하다 사전에 예고하지 말고 아무 시골집이나 식사시간에 문을 두드려 물어보시오. 또 시골길 걷다가 아무 행인에게나 물어보시오.”

..............................................................

 

 

 


--------------------------------------------------------------

 


.................................................

 북한군의 입대절차에 따르면 만14세가 되면 징집대상자로 등록된 후 16세때 시군 인민병원과 도 인민병원에서 2차례에 걸쳐 징병신체검사를 받도록 되어 있으며, 신체검사 합격기준은 키 150㎝, 체중 48㎏, 시력 0.8이었으나 식량난으로 청소년들의 체격이 왜소화되자 1994년 8월부터 키 148㎝, 체중 43㎏, 시력 0.4로 하향조정되었다.

..................................................

 

 


---------------------------------------------------------------

 

 

  [....집단농장 때에 1.5t 내지 2t 정도나던 옥수수 밭이 개인농화 했을 때 6t 내지 7t 정도였다. 약 500%의 증수인것이다.....]

 

 


.......................................................


그렇다면 왜 북한에서는 식량난으로 인구 일곱 명 당 한 명 꼴로 굶어죽은 대 참사가 벌어졌는가?


식량난의 많은 원인 중에서 근본원인은 공산식 집단농이다. 자유세계에서는 집단농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북한에 비료를 보내주고 슈퍼종자를 보내주면 식량난이 해결되지 않겠는가 하는 환상을 가지는 것이다.

북한에 살던 필자 역시 과학원 연구소의 책상머리에서는 집단농의 심각한 폐해를 실감 있게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현장체험에서였다.

 

직접 연구한 확신 있는 종자를 가지고 농민들을 직접 도와주어야겠다는 충성심으로 집단농장(협동농장이라고 함)에 6년간 나가 보았다. 역시 체험이 중요했다. 식량난의 근본원인은 아무리 일해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공산식 시스템이었다.

그 폐해가 얼마인지는 말이 필요 없이 과학자로서 시험을 통해 검증해보았다. 농민 한 사람이 다루는 옥수수밭 1정보(3000평)를 단위로 비교를 해보니 집단농장 때에 1.5t 내지 2t 정도나던 옥수수 밭이 개인농화 했을 때 6t 내지 7t 정도였다. 약 500%의 증수인것이다.

 

새 품종을 만들려면 10여 년 동안 연구하여 기존 품종보다 2% 내지 3%만 증수해도 대단한 발견으로 ‘발명증’을 받는다. 따라서 500%의 증수 효과를 본다면 새 품종연구가 더 필요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인민에게 이밥에 고기국 먹이시려고 한평생 바치시는 어버이수령님’께 중앙당 제1호 편지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 제의는 반동사상으로서 필자는 탈북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식량난의 근본적 해결책은 자명하다. 그것은 개인농화를 실시한 등소평 식 농업개혁이다. 이러한 근본적 해결책이 없는 그 어떤 대북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뿐이다. 더욱 나쁜 것은 그것이 권력유지를 위해 개인농화를 하지 않는 악의 세력을 도와주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이미 북한주민들은 10년간 배급 없이 자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외부세계가 그토록 바라고 있는 시장경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배급이 끊긴 상황에서 살아 있는 비결은 바로 ‘주민경제(지하경제)’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개인 뙈기밭 농사’와 ‘개인장사’가 그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의 북한식량난의 긍정적 결과가 있다면 통행의 자유를 얻게 되었고 한편 자체 생산 활동 즉 ‘주민경제’를 확고히 형성시킨 것이다. 김정일 정권이 어쩔 수 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주민경제’의 활성화이다. 이와 반대로 만약 그동안 끊겼던 식량배급이 시작되도록 대북지원이 이뤄진다면 이것은 곧 ‘주민경제’의 말살을 의미할 것이다.

 

 

 

 

-----------------------------------------------------------

 


.........................................................


그전에 논두렁은 경지면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콩 심어 먹어도 된다. 이렇게 하니까 논두렁 콩들이 얼마나 잘됐습니까. 사람의 키를 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어떤 집에서는 1년 내내 비지를 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관희 농업비서가 잘했다고 그랬는데 그런데 그것도 그만두라, 이렇게 했습니다.


그것도 자본주의 요소라고 해서 폐지시켰습니다. 또 사회보장 받는 사람들이 강에 나가서 물고기 잡고, 해변 가에 가서 조개 갖다 팔고 그랬는데... (나는 그런 시간이 없어서 잘 관심을 못 뒀지만) 우리 집 사람이 얘기하는 것 들어보면 이제는 시장에 없는 것이 없다, 아주 살맛 나게 됐다, 그랬는데 그것도 자본주의다 해서 다 없애지 않았습니까.


나는 계속 주장했었습니다. 도급제 좀 실시합시다. 그러면 김정일은“그런말 하지 말어” 이런 인간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통이 큰 행동입니까. 그보다 더 통이 조그만 놈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천하 쩨쩨한 인간입니다.

....................................................

 

 

 


---------------------------------------------------------------

 


  [.... 글자 한자가 대문짝만한 구호가 나붙었는데 그것은 <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다 > 라는....]

 

 

............................................................


경제발전의 동력은 사람들의 사적 이해관계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찍이 저 유명한 아담 스미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생산하고 교환하고 소비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사람들의 사적 이해관계를 부정하고 공적인 이해관계를 내세운다.

공적 이해관계는 외상과도 같이 믿기 어려울 뿐더러 많은 경우에는 집권자의 이해관계에 그치고 사막의 강물처럼 아래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결국 사회주의경제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떠난 무동력 경제가 되고 만다.

 

자본주의 경제가 사람들의 이해관계라는 동력에 의해 자동적으로 굴러가는 자동차와 같다면 사회주의 경제는 권력이라는 힘에 의하여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달구지와 같다. 자동차는 빠르고 달구지는 느리거니 한반도에서 남북한 경제의 현격한 차이는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최근년간(1996년) 북한의 포전(圃田)들에 글자 한자가 대문짝만한 구호가 나붙었는데 그것은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다>라는 것이다.

어째서 공유제를 하면서도 공유제를 의미하는 <우리의 포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하지도 않는 사유제를 의미하는 <나의 포전>이라는 문구를 썼을까? 북한 당국자들도 이제는 집단주의가 개인주의보다는 농민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농업집단화로 농업경리와 농민의 이해관계를 분리시켜 놓고는 일이 잘되지 않으니 자본주의 사전 속의 말을 훔쳐다가 농업경리와 농민의 이해관계를 연결시키려는 옅은 수를 쓴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빈 말공부가 아니라 제도적인 조치가 필요한 때이다.

...........................................................

 

 

 


-------------------------------------------------------------

 

 


    *  1997  [...처음으로 귤, 수박, 참외, 땅콩,과자를 ....]

 


.............................................................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중국 땅에서 훈춘 장마당에 갔습니다.
 


장마당에는 없는 것이 없었고 처음 보는 과일과 먹을 음식으로 굉장했습니다. 저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아,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그런데 갑자기 저의 12살 막내아들이 <뱀이다.> 하고 놀라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달려 가보니 누렇고 거무스레한 뱀처럼 둘둘 말려있는 순대를 보고서 아들이 지기도 모르는 사이 비명을 지른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김 아바이는 귤, 참치, 수박, 땅콩, 과자, 돼지고기 등 갖가지 식료품을 샀습니다.

 

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은 나서 자라 처음으로 귤, 수박, 참외, 땅콩,과자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

 

 

 

--------------------------------------------------------------

 

  
  1999


..............................................................


“조선소 왔소?‘하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예“하고 얘기하는데 목이 꽉~ 매었어요. 조선말 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그런 마음 또는 이제는 살았다 그런 안도감과...하여튼 만감이 교차하며 눈물이 확 나더라고요. 집으로 들어오라 그랬어요. 할머니께서 목욕물 덥혀줘서 목욕하고, 한잠 푹 잤어요.

 

자고나니까 할머니가 밥을 했는데, 그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달걀을 아마 그 할머니가 8알인가 10알인가 삶았어요. 제 마음에는 몇 년 동안 달걀을 못 먹어 봤기 때문에 그걸 다 먹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밖에 못 먹었어요. 그때 하나 먹고 수저를 놓으면서 상당히 아쉬웠어요. 하나 더 먹고파. 그런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못 먹는 곳에서 와서 저렇게 게걸스럽게 여자가 먹는구나!‘ 이런걸 보여주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못 먹고 외소했던 점 그것이 아직도 내 가슴에 박혀있습니다.

 

그 때 또 하나의 충격은 그 집에 들어갈 때 토방에 철 그릇에 밥덩이하고 고깃덩어리가 있었어요. 그때 그걸 보면서 ‘아! 얼마나 음식이 많이 남았으면’ 변할까봐 밖에 내놓은 줄 알았거든요. 하루, 이틀 그 집에서 자며 알아보니까 그것이 개밥이더라고요. 개를 줄려고 밖에 내놓은 것이었어요. 고깃덩어리 기름덩어리들이 뒤굴뒤굴 굴러다니는데 개가 안 먹더라고요.

 

그 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런 밥을 북한에서는 누가 먹을까? 아마 당 비서나 먹겠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어쩌면 당 비서도 하루 세끼는 먹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 비서는 중국의 개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 때 너무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후에 그 집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데 제가 한 열흘 동안 아무 말도 안하드레요. 하루세끼 먹고 자고 그 다음에 한국 라디오만 듣고 계속 그랬더래요.

..........................................................

 

 

   *

.........................................................


중국에 온 후 혹시 붙들려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용정시 주변 산골마을 농가에서 일을 도와주며 살았다. 그 집에서는 사냥개 네 마리가 있었다. 그 집에 처음 도착 했을때 개가 쌀밥 누릉지를 먹고 생선고기 국물을 먹는 것을 보고 가족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

..............................................................

 


   *

............................................................

김일성, 김정일은 매년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고 공약을 하곤 했는데, 그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는 잘사는 나라도 아닌데 개가 쌀밥을 먹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개만도 못한 존재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


이 외교관은 북한에 돌아가서 파키스탄에서 개가 쌀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

 

 

 

 


  2008  [...'감자는 곧 쌀이고, 쌀은 곧 사회주의'라는 새 가르침을.....]

 


.............................................................

"김정일 장군님께서 '감자는 곧 쌀이고, 쌀은 곧 사회주의'라는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김일성 수령님의 '이밥(흰쌀밥)에 고깃국' 구상과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강사는 이런 반응을 짐작했다는 듯 준비된 말을 꺼냈다.


 "장군님께서 '감자는 암 방지에 대단히 효과적이다. 서양사람들도 감자를 주식으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중 속에서 "배고파 죽어가는 판에 웬 암 걱정이냐" "언제는 서양 쪽은 쳐다보지도 말라더니…"라는 반응이 나왔다고 류경원 기자는 전했다. 북 주민은 '감자가 쌀'이라는 구호가 나온 배경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코드 안 맞는 이명박 정권으로부터 식량지원을 받기 싫다는 '반리명박 깜빠니야(캠페인)' 차원이라는 것이다.

............................................

 '감자가 이밥보다 건강에 좋다'는 장군님이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같이 '너무 잘 먹어서 생기는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 만한 주민들은 다 알고 있다.

.........................................................
 

 

 

 

  2010.1.


.............................................................


정초부터 북한의 김정일이 쌀밥타령이다. 1월 9일자 노동신문은 김정일이 “수령님은 인민들이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살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이 유훈을 관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김정일은 또 “아직 우리 인민들이 강냉이밥을 먹고 있는 것이 제일 가슴 아프다는 말을 했다”고 지난 1일 노동신문이 전했다.

 

김일성의 ‘이밥에 고깃국’ 얘기는 지금으로부터 60년도 더 이전에 나온 말이다. 그는 해방 직후 평양에서 가진 첫 군중대회에서 “공산주의란 이밥(쌀밥)에 기와집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외쳤다. 1958년 1월 경공업 부문 열성자회의에서는 “조선의 농민들은 기와집에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으면 부자라고 했다”며 “이는 우리 농촌에서 머지않은 앞날에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 1962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6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대를 이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켜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체제와 제도상 지켜질 수가 없다.

.................................................................

 

 

 

 

  2010.2.


.........................................................


북한은 이 같은 풍조를 막기 위해 국경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중국에서 강제 송환된 탈북자들을 강연회에 내보내 '중국에서 인신매매단에 걸리면 노예보다 못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북한 주민들이 이를 믿지 않고 있다고 대북사업가들은 말했다.


북한의 무산 혜산 회령 등지를 드나드는 한 사업가는 "북한의 선전에 대해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가도 밥은 먹지 않겠느냐"며 "중국이 그렇게 나쁜 곳이면 그 많은 탈북자들이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반문한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또 '중국에선 강아지도 이밥(흰 쌀밥) 먹는다더라'며, '이밥에 소고기국을 먹이라는 김일성 수령의 유훈을 못 지켰다'는 김정일의 말을 조롱하고 있다고 한다.

.............................................................

 

 

 


----------------------------------------------------------------

 


....................................................

어제 개성을 관광하고 온 한 일본인이 말했다.

"개성시내에선 집에서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 늙은이가 자전거에 나무토막 하나를 소중히 싣고 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식당에도 온기가 없었고 밥도 식어 있었다. 국물만 따뜻했다. 개성에서 溫氣가 있는 곳은 한국에서 올라간 관광버스뿐이었다."
 
.....................................................

 

 

 

------------------------------------------------------------------

 

 

...........................................................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일정한 적응교육을 받고 집을 얻어서 하룻밤을 묵으면 그 다음날 아침에는 반드시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문을 열고 나가보면 어김없이 신문을 구독하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입니다. 석 달에서 길게는 일 년까지 공짜로 신문을 넣어주는 일도 있습니다.


이 때 탈북자들은 놀란다고 합니다. 신문을 공짜로 넣어주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집집마다 신문을 한두 개씩 본다는 것이 더 놀랍고, 그 신문이 30페이지, 40페이지, 많을 때에는 60페이지까지 두껍게 발간되는 것을 보고 더 놀란다고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북한에서는 당 간부만 신문을 보고 일반 사람들은 신문을 볼 수 없고 아침에 직장에 나가면 당 간부가 그날 읽은 노동신문으로 교육을 하곤 합니다.

 

아파트에 들어간 탈북자들은 또 주차장에 승용차가 많은 데 놀란다고 합니다. 한 가구에 평균 2대의 승용차를 굴리기 때문에 아파트마다 주차장이 모자라서 야단입니다. 북한에는 아파트에 아예 주차공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탈북자들은 돈을 벌면 맨 먼저 승용차를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나는 북한의 부총리급 이상이다”라고 자랑을 하곤 합니다. 북한에서는 아마 사적으로 승용차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부총리급 이상인 모양입니다.


북한은 정보, 사람, 돈의 이동을 통제하는 사회입니다. 움직임이 거의 없는 사회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은 반대로 움직임이 너무 강해서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KTX 고속전철이라는 것이 3년 전부터 개통되었습니다. 이 기차를 타면 서울에서 대전까지는 50분, 서울에서 대구까지는 1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차를 타고 잠을 자다가는 대구에서 내려야 할 사람이 부산까지 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빠릅니다.


북한에서 만약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청진으로 가려면 일주일 쯤 걸리지 않습니까? 기차가 가다가 서다가 고장나기도 하고, 또 다른 기차로 갈아타야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최근 아일랜드 공영방송 기자가 북한 취재를 해서 보도를 했는데, 이 기자도 북한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고 보따리를 들고 다니고 또는 짐을 지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특히 군인들도 차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면서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같이 타고 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움직임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움직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미국여행을 하고 온 탈북자들은 김정일도 갈 수 없는 미국에 다녀왔다고 자랑을 합니다. 노예생활을 하던 북한 주민이 자유를 얻으면 그 순간부터 그는 김정일보다 더 높아지고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


파키스탄에서 북한 대사관에 근무했던 한 외교관이 한국으로 탈북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 사람을 만났더니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파키스탄에서는 개를 놓아 키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 집에서나 밥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얀 쌀밥을 양푼에 담아서 밖에 내어놓으면 지나가는 개가 먹고 가곤 한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 같으면 북한에서는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인데, 이 북한 외교관은 파키스탄의 개가 쌀밥을 먹는 것을 보고 기분이 이상해졌다고 합니다. 김일성, 김정일은 매년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고 공약을 하곤 했는데, 그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는 잘사는 나라도 아닌데 개가 쌀밥을 먹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개만도 못한 존재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더 희극적인 것은 이 외교관은 북한에 돌아가서 파키스탄에서 개가 쌀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불평분자로 몰려서 수용소로 사라질까 겁이 났기 때문이겠죠. 파키스탄의 개는 쌀밥을 먹는다고 말할 자유조차 없는 북한에 가서 살겠다는 의리가 있는 친북좌익 세력들은 또 한국에는 없습니다.

..............................................................

 

 

 

-----------------------------------------------------------------

 


"왜 미국이 김정일이를 그냥 두는지 모르겠다"

 


........................................................................

지난 5월 모 국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국가를 방문한 북한의 한 엘리트인사는 해외교포들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불쑥 "왜 미국이 김정일이를 그냥 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이 자리에 있던 해외교포가 전했다.


이 인사는 "외국이긴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다 단속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다른 참석자들이 주의를 주자 "조선에서도 우리끼리 모이면 김정일 욕도 하고 다들 이런 얘기들을 한다. 김일성 때는 그래도 먹고는 살았는데, 지금은 당이 먹는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니까 인심도 각박해지고 당을 욕한다"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

 


     *


..............................................................


  “김정일 한 놈만 죽으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말이 북한 전역에서 회자되고 있다.

.............................................................

 

 

 

----------------------------------------------------------------

 

 

.........................................................

‘좌파의 늪’은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오기 힘들다. 좌파 정책은 중산층을 몰락시켜 빈곤층으로 내몬다. 그렇게 생겨난 빈곤층은 ‘평등한 세상’이라는 좌파 구호에 솔깃해 한다. 좌파정책은 빈부격차를 확대하고, 확대된 빈부격차는 다시 좌파 정권의 자양분이 된다. 그래서 좌파는 계속 정권을 재창출하지만 나라는 골병이 든다. 남미(南美) 여러 나라에서 되풀이 돼 온 악순환 구도다.
........................................................

 


............................................................

1949년 건국한 중국과 1947년 독립한 인도는 처음엔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했다. 그 길은 빈곤에서 빈곤으로 이어지는 미로였다.

중국은 1989년부터 시장 시스템을 도입했다. 인도는 1991년에 자유주의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지금 중국과 인도는 각각 10%, 8%의 고속성장을 하며 세계 경제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좌파의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우향우(右向右)’를 하기까지는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

 

 

 

 

 2009.9. [...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가 가장 높은 나라는 중국(74%)이었으며 ... 미국 역시 71%로 인도(70%)와 함께 자유시장을 선호하는 것으로.....]

 

........................................................

미 메릴랜드대 국제정책태도프로그램(PIPA) 연구팀과 캐나다의 글로버스캔이 최근 한국과 미국 등 세계 20개국 시민을 상대로 금융위기 1년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1%가 ‘자유기업 시스템과 자유시장경제’가 미래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


역설적으로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가 가장 높은 나라는 중국(74%)이었으며 필리핀(73%)이 뒤를 이었다.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미국 역시 71%로 인도(70%)와 함께 자유시장을 선호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


2009.9.

 

 

 

-------------------------------------------------------------

 

 

 [....쏘련 사람가운데서 사회주의로 돌아가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7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


소련 경험을 보면,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에 생활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

 자본주의 민주주의에로의 과도과정, 사회주의 이행과정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개혁개방이후)사회주의시대보다 더 잘 사는 계층이 생겼을 뿐 아니라. 더 어렵게 사는 계층도 생겼습니다. 특히 고령층은 사회주의가 무너졌을 때부터, 약 5년 사이에 제일 어려웠습니다. 98년까지. 그 후에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쏘련 사람가운데서 사회주의로 돌아가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분위기는 북한의 고난의 행군과 비슷했습니다. 물론 물질적으로는 북한 보다 많이 낳았습니다. 굶어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말에 들어와서 부터는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지금 구 쏘련에서 옛날 사회주의 체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회주의체제의 복구를 주장하는 정당은 있습니다. 러시아 공산당을 비롯한 정당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선거 때 지지율은 10프로에 불과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90프로 사람들은 사회주의 복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러시아 푸틴대통령은 얼마 전에 “쏘련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쏘련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진짜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지상낙원은 북한의 선전 체제 속에만 있는 것입니다. 90년과 비교해 보면 개인 승용차 숫자는 거의 5배로 늘었습니다. 또한 지금 모스크바를 비롯한 대 도시들에서 대규모주택건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치의 자유와 경제가 많이 좋아 졌습니다 . 시장에 가면 고양이 뿔 내놓고 다 있습니다.

...........................................................

 

 

 

 


소련을 무너지게한 동력 [란코프의 소련이야기 제4회]  
 

 

 
소련과 북한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국가가 사회주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사실상 15년 전부터 아마 90년대 초부터 자본주의 경제 장마당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에 빠졌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북한에서 탈북, 장사하지 않은 사람들은 굶어죽었습니다. 사실상 북한에서 장사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소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련은 대 부분 사람들이 70년대 말 아마 80년대 말까지 장사를 안했습니다.


옛날 북한처럼 장사를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변화는 위에서 시작했습니다. 소련사람들은 60년대 말 까지 대부분, 체제를 지지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 공산당이 했던 약속을 믿었습니다. 자기나라가 누구나 행복하게,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줄 알았습니다.


물론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나라들보다 잘 못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는 소련사람들이 정치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말까지 소련사람들은 자기들의 나라 잘못을 옛날 봉건주의 유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진 1960년대 말부터 소련사람들 가운데 소련정치제도에 대해서 의심이 깊어졌습니다. 외국과의 격차가 세월이 갈수록 넓어 졌습니다. 또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있는데 수많은 소련 사람들은 자기의견 자기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희망했습니다. 이 체제하에서는 이와 같은 자유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60년대 말부터 소련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지식인부터 이러한 생각이 확산, 세월이 갈수록 전사회로 확산했습니다. 7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조금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유지 한다 하도라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젊은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희망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였습니다. 완전한 자본주의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압도적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시에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진짜 공산당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은 70년대에 헤아릴 수 없었지만 85년경에 고르바쵸프가 등장 그는 이와 같은 사상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르바쵸프는 농민출신이지만 60년대 모스크바 종합대학을 다녔고, 공산독재에 대한 실망도 컸습니다.


당시 공산당간부들은 평범한 주민들보다 공산주의에 해한 실망이 더 컸습니다. 사실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련이 미국보다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나 서독사람들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80년대 중엽, 85년 이후 고르바쵸프 정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고급 간부들로부터 시민들이 다 지지했습니다. 고르바쵸프 총 비서는 처음에 자본주의로 이행할 생각은 없었고, 사회주의 개량 사회주의 개방이 목적이었습니다.


서양경제성과, 정치적 자유에 대한 보도를 지양했습니다. 사실대로 보도했습니다. 옛날처럼 공산당을 무서워하지 않고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보도를 보는 사람들은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개혁보다 급진적 개혁을, 완전한 자본주의 체제를 요구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경제는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장사가 시작했다. 87년 88년, 90년대 초부터는 장사가 성행했습니다. 결국 91년에 소련체제가 무너졌습니다.

.........................................................

 

 

 


--------------------------------------------------------------

 

 

http://www.donga.com/fbin/moeum?n=column$i_64&a=v&l=9&id=200703010284

 

입력 2007.03.01


[김순덕 칼럼]‘별놈의 진보’ 그 잠꼬대
 

 

 

이스라엘에 관심 없는 사람도 키부츠는 대충 안다.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먹는다는 공동체 말이다. 그중 가장 오랜 97년의 역사를 지닌 ‘데가니아’가 지난주 주민 85%의 찬성으로 시장경제를 선언했다. 이스라엘 영자지 하아레츠는 ‘암울한 현실이 유토피아를 눌렀다’고 했다.

 

세계화와 좌파 경제는 안 맞는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쓴다는 이상(理想)은 아름답다. 그래서 카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역사의 종착지로 설파했고,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놈 촘스키도 1950년대 잠깐 살았던 키부츠를 고매한 연대(連帶)사회로 칭송했다.


그 이상향이 1980년대 중반부터 이스라엘 경제 침체 속에 흔들리고 있다. 40%가 파산했고 30%는 빈곤선 이하다. 현재 인구의 2.6%가 사는 268개의 키부츠 중에 개인적 자유와 경쟁보다 사회적 책임과 평등이라는 좌파 이상을 고수하는 곳은 많아야 40개일 정도다.

‘진화’하는 키부츠는 능력대로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가는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데가니아도 1년 전 시장경제를 시범 도입했더니 별안간 수입이 늘고 복지지출이 줄었다. 빈둥거리던 사람들까지 일을 찾았다. “일과 보상을 연결시키니 모두에게 이익이더라”고 이 나라 노동당원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 했다.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시장경제로 돌아선 지금도 좌파는 “방법이 잘못됐지 방향은 옳다”고 강변한다. 대통령은 2004년 탄핵사건 뒤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다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 이거다”라며 진보를 그 대척점에 놨다. 이 말이 맞는다 치자. 거기에 교조적 진보, 유연한 진보, 별놈의 진보를 다 갖다 놔도 진보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평등의 한계: 키부츠의 통찰’이라는 지난해 논문에서 미 스탠퍼드대 랜 아브라미츠키 교수는 “생산성 높은 사람일수록 키부츠를 떠났다”고 했다. 상품과 자본 인력이 세계시장을 넘나드는 세계화 속의 자유 사회에선 어떤 이데올로기도 개인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


세계화와 함께 몰아닥친 기술정보화는 개인의 창의와 기업의 혁신에 놀랄 만한 부가가치를 안겨 주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도 독일과 일본에 추월당할 것을 걱정했던 미국 경제가 기술정보산업과 맞물려 눈부시게 성장한 것도 이 덕분이다. 요즘 유럽 경제의 회복 역시 집단논리와 시장규제에 억눌려 온 기업들이 알게 모르게 미국식 유연성을 도입했기 때문이라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분석했다.


영국은 1980년 영국병으로 고사(枯死)하기 직전에야 좌파 경제를 물리쳤고, 인도 역시 1990년대 경제 파탄을 맞고서야 시장을 받아들였다. 인도 출신의 미 컬럼비아대 교수 자그디시 바그와티는 “영국에서 좌파경제학을 공부했던 나와 만모한 싱(1990년대 인도 재무장관·현 총리)이 1950, 60년대 시장을 못 믿고 정부 간섭을 제도화했다가 개혁하느라 고생했다”고 했다.

..........................................................

 

 

 

 


-----------------------------------------------------------------

 

 


............................................................


북한의 모든 문제는 독재권력에 의한 폐쇄성에 있다. 그 폐쇄성은 또한 독재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북한의 독재권력과 폐쇄성은 결국 한 마음 두 몸이다. 분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외부의 지원도 독재권력과 폐쇄성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개혁개방의 의미 자체를 모르거나 알고서도 북한의 독재체제를 유지시켜 주기 위해 아름다운 말을 골라 쓰는 음흉한 인간이다.

 

외출할 때마다 오색구름이 떠오르고, 손을 치켜들 때마다 수만 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환호하고, 골프채를 휘둘렀다 하면 홀인원하거나 이글하거나 버디하고, 눈살을 찌푸릴 때마다 식량과 달러가 배떼기로 굴러오고, 헛기침할 때마다 대포나 총을 맞아 피를 토하며 죽는 자가 멀찍이 떨어진 바다나 가까운 바닷가에서 속출하는데, 이 자폐증 환자가 어떻게 독재권력이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시장경제를 받아들인단 말인가. 

 ........................................................


 한국의 가장 큰 경쟁력은 오렌지족의 불법폭력시위 실력이 아니고 대기업의 경쟁력이다. 이 대기업이 바로 오렌지족의 부모다.


오렌지족들이 권력을 잡은 이후, 오렌지족 권력과 한 통속이 된 오렌지족 노조와 오렌지족 지식인들이 자해공갈단을 구성하면서, 한국의 대기업이 받은 20년 수모와 무수한 도산과 국제 위신 추락과 경쟁력 하락을 생각해 보라. 그와 더불어 중소기업의 가중된 고통을 생각해 보라.


좀이 누렇게 쓴 19세기의 자폐자해경제 찬양 경제교과서를 펼쳐놓고 거기에 한국의 대기업을 끼어 맞추는 것에 신바람을 낸 결과는? 잘하면 잘할수록 수모를 당하고 못하면 못할수록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두둑이 받고 밉보이면 시장에서 사라지고 곱보이면 국민기업이 되어 국민의 혈세로 생명을 유지하고, 이게 바로 자해공갈단이 한 짓이 아니고 무언가. 이게 바로 자해경제가 아니고 무언가.  

 

 자폐경제는 처절히 망할 수밖에 없고 자해경제는 시름시름 망할 수밖에 없다. 나랑 너랑  함께 잘사는 시장이 한쪽에서는 탄생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되살아나고 커질 때, 법질서 안의 자유민주가 무질서의 민중민주를 엄히 다스릴 때 비로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한민족 공동체가 탄생할 것이다.


자폐증 환자가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 쫓겨날 때에, 오렌지족 자해공갈단이 콩밥에 감지덕지할 때에 중국의 기적을 능가하는 21세기의 새로운 기적이 한반도에서 한 번 더 일어날 것이다.

 

 

 


--------------------------------------------------------------

 


............................................................


권력이 아니라 소비자 즉 대중이 시장을 좌우하고 또 시장은 나아가 생산을 좌우하는 것이 시장경제라면 그것이 대중적인 경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시장경제는 민주주의적인 경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상품 앞에서 구매자들이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 거기서는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차별시 되는데 누구는 사도 누구는 구경만 할 수 있을 뿐 돈이 있고 사고 싶어도 못 산다. 이러한 구매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국가가 사라고 지령하는 물건만을 살수 있는 공급제도 하에서 주민들을 주는 대로 먹는 우리 속의 짐승처럼 주는 대로 사서 쓰는 <우리 속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소비자로 되였다.

...........................................................

 

 

 

-------------------------------------------------------------

 

 

........................................................


지금까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유익한 선거는 복수정당 복수후보에 의하여 투표경쟁을 통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을 주민의 대표자로 뽑는 제도입니다. 이런 선거제도를 통해 무소속 후보자도 나올 수 있고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누구나 정당을 설립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모든 후보자는 정견을 발표하고 정책을 제시하여 유권자들에게 득표경쟁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장을 마련했습니다. 유권자는 각 후보의 정견과 정책, 도덕성, 인품 등을 고려하여 자기의 마음에 든 사람을 고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을 비롯한 서구민주주의 사회에서 실시하는 일반적인 선거의 현실이요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사정은 어떨까요. 말할 필요도 없이 주권재민은 커녕 기본적인 선거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일반적으로 북조선에서 선거는 대개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을 비롯한 각급 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할 때 실시됩니다. 북조선의 모든 정치과정은 철저히 조선노동당의 통제 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선거가 ‘민의를 수렴하는 통로’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이 선거를 실시하는 이유는 이른바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민주집중제)라는 이름아래 정치과정이 주권재민의 사상을 반영하고 민주주의 원리와 제도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 것처럼 대내외에 떠들기 위한 것입니다.


북조선에서는 선거법에 따라 각 선거구 별로 복수 입후보를 허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단일후보에 대한 찬반을 묻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후보선출 방법은 각 직장, 사회단체, 주민회의 등에서 선출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사실은 중앙당 조직지도부에서 선거 수개월 전에 후보자로 적합한 인물을 내사에 명부를 작성합니다.


대의원의 선거 진행절차는 선고 공고 전에는 중앙당에서 각 도당에 후보자 선정 지표를 하달하고 이를 기초로 각 도당에서 선거구별로 후보자를 선정해 중앙당에 제출하며, 중앙당에서 최종심사해 후보자를 확정합니다. 결국 중앙당에서 후보자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거 공고 후 선거 60일 전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선거를 공고하고 중앙선거위원회를 조직합니다. (선거법 11·18·19조) 그리고 선거 공고 10일 이내에 도(직할시)와 시군선거위원회를 조직합니다. (선거법 23조) 선거 40일 전에 선거구를 조직(선거법 17조)하며, 선거 공고 5일 후와 선거 3일 전 사이에 후보자 추천 및 등록이 완료됩니다.


선거 15일 전에 선거인 명부가 작성되며(선거법 28조), 선거 3일 전에 후보자 공시가 이루어집니다. (선거법 47조) 한편, 투표율과 찬성률을 보면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부터 100% 투표에 100% 찬성을 선전해오다가 9기와 10기 선거부터는 99.78%, 99.9% 투표, 100% 찬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100% 찬성이란 북조선 헌법에 일반·직접·평등·비밀선거를 규정(제89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자유의사에 의해 투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00%에 가까운 수치는 북조선 체제에 대한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선전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혹심한 주민들의 정치적 무권리 상태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에서는 우리가 생각하기 힘든 방법으로 투표를 하고 있는데 1·2기 대의원 선거에서는 찬성자를 흰색 함, 반대자는 검은색 함에 넣는 흑백 투표함 제도를 채택했으나, 1962년 3기 선거 이래 단일 투표함제로 바뀌었습니다. 찬성자는 그대로 함에 놓고 반대자는 X표시를 하여 투표함에 넣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감시자는 누가 X 표시를 하는지 손쉽게 판별할 수 있도록 하여 사실상 100%찬성투표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반대의사가 있더라도 반대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

 

 

 


-----------------------------------------------------------------

 

 


............................................................

난쟁이 국가가 되어 남자 군인의 키가 평균 162cm밖에 안 된단다. 군화는 평균 250mm라고 한다. 이 지구상에서 청년들이 아버지 세대보다 키가 작은 유일한 나라라고 한다.


두만강에는 탈출하다가 죽은 시체가 둥둥 떠다닌다. 이것을 한국의 TV에서 직접 찍어서 전국에 수십 번 방영했다. 한창 재롱을 떨고 장난치며 뛰어 놀 아이들마저 학교도 못 가고 꽃제비가 되어 만주 벌판에서 도둑고양이처럼 살고 있는 것도 한국 TV에서 다 보여 주었다.
 
...........................................................

 


[ 남한 173 cm ]


......................................................

한국인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일본인과 닮지 않은 반면에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cm이다
...................................................

비숍 여사의 글이 100년 전에 쓰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 남성의 평균 키는 100년 동안 약 10cm 증가했다.
...........................................................

 


그는 최근 북한의 군입대 허용 키가 1m 45cm까지 내려갔다며, 북한의 군대는 육체적, 기술적, 사상적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

 

 


  [  대한민국  ]

 

 

일인당육류소비33.4kg : 자동차 1대당 인구 3명 , 해외여행 1천만명.

 


2007년  국민소득  2만 45달러 

2005년  연간 해외여행 1천만명 돌파 

2006년  자동차  3명당 1대 , 가구당  0.87 대 , 1600 만대

2006년  한국인 평균수명 79.1세..OECD 평균 넘었다

2007년  국제특허출원 세계 4위  7061건 ( 미국·일본·독일 다음 )

2007년  대학 진학률 83.8%로  세계 최고 수준.( 해외 주요국 대학 진학률 50% 안팎 )

2008년. 대한민국 수출 4000억 달러를 달성.

 


[...일인당 평균 육류 섭취량은 2002년 33.4kg...]

[..한국인의 일인당 생선 소비량은 66.9㎏으로 일본을 앞섰다..]

 

 

 
  *

[...2006년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1인당 GDP가 400$ 정도 된다고 추정했다. ...]




 

2010-07-01 23:34:01 | ipaddress : 220.118.*.41
글자의 색상을 지정합니다 글자의 배경색상을 지정합니다
글자를 진하게 합니다 글자를 기울이게 합니다 밑줄을 긋습니다 취소선을 긋습니다
link를 만듭니다 이미지를 추가합니다 동영상/플래쉬등을 추가합니다
이모티콘을 추가합니다 글박스를 만들거나 글숨김 기능을 추가합니다 html 코드를 직접 입력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일자
추천
조회
98
2009-02-16
0
1,362
97
외피
2010-07-01
0
86
96
처음 배불리
2010-07-01
0
69
95
필봉농악
2010-02-20
0
313
94
동의대
2009-11-13
0
498
93
소리노리
2009-10-08
0
509
92
문화메신저
2009-09-29
0
510
91
사)한국문화예술진흥회
2009-09-24
0
522
90
rlaguswjd
2009-08-08
0
625
89
rlaguswjd
2009-08-08
0
623
88
rlaguswjd
2009-08-08
0
641
87
소리노리
2009-07-30
0
626
86
소리노리
2009-07-30
0
574
85
소리노리
2009-07-30
0
522
84
서울시국악관현악단
2009-07-17
0
518
83
전통연희축제
2009-07-15
0
517
82
고궁국악기
2009-06-30
0
596
81
한국명가
2009-03-30
0
976
80
부산시립국악
2009-03-16
0
961
79
김모리
2009-02-18
0
1,143
 
부산어머니가야금연주단